주변의 누군가가 힘든 상황을 겪고 있을 때, 우리는 그 누군가에게 '잊으라'라고 이야기할 때가 있다. 아프고 힘든 기억을 갖고 사는 게 그 사람한테 더 해가 될 것 같으니까, 딴에는 좋은 뜻으로 잊어버리라고 이야기한다.
"훌훌 털어버리라고, 그러다 병 된다고, 잊어야 버틴다고..."
나 또한 살아오는 동안 주변에서 깊은 고민과 걱정을 가진 다른 사람들에게 '잊으라'는 얘길 쉽게 한 적이 있었다. 당시 나의 마음은 진짜로 그들이 가지고 있는 아픈 기억을 잊고 행복했으면 하는 마음에서였다. 하지만 내가 힘든 일을 겪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잊으라고 했던 말은 내게 위로가 되지 못했다.
그건 그들의 진의가 의심된다거나 선의를 오해해서가 아니었다. 그냥 내게는 기억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이고, 나만 잊는다고 해서 해결될 일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TV를 보다가 잊으라는 말보다 더 좋은 위로가 되는 말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적이 있었다.
“슬기로운 의사생활” 시즌2의 에피소드였는데, 오랜 투병생활 끝에 하늘로 간 아기를 가진 어머니는 아이가 세상을 떠나고 나서도 수시로 아이가 입원해서 치료받던 소아 중환자 병동을 찾았다. 간호사들에게 간식을 사 오고 의사 선생님을 찾아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면서, 병원 사람들은 혹시나 저 보호자 분이 아이가 잘못된 것이 의료사고 때문이라고 생각해서 증거를 찾으려고 저러시는가 하는 의심의 눈초리로 방어적인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극 중 장겨울 선생이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고민을 상담하자 안정원 교수는 그 보호자 분의 의도를 다음과 같이 추측해 알려주었다.
태어나서 줄곧 병원에서만 지내다 떠난 아이를 기억하는 게 병원 식구들밖에 없으니 그 아기에 대한 기억을 나눌 사람이 우리 밖에 없어서 오시는 걸 거라고, 그러니까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보호자 분의 말씀을 잘 들어드리라고.
이어진 이야기에서 장겨울 선생이 그 보호자 분에게 먼저 떠난 아이를 기억하며 대화에 나서자 그것으로 그 보호자 분은 크게 위로받는 것을 보았다.
함께 기억해주는 것이 그냥 잊으라는 것보다 훨씬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느낀 순간이었다.
우리는 왜 아픔을 함께 기억하고 위로하는데 인색할까.
삼풍백화점 참사 희생자 위령탑이 사고가 났던 장소가 아니라, 그로부터 수 km 떨어진 양재 시민의 숲에 위치하고 있는 것도 우리가 피해 입은 사람의 고통을 함께 기억하는데 인색했던 게 아닌가 싶다.
아픔을 가진 사람들에게 그 아픔은 온전히 당신들 것이니 잘 잊고 편하게 살라고 한다면 과연 그분들은 그렇게 살 수 있을까? 잊어서 치유될 수 있는 일도 물론 많겠지만, 사람들의 아픔 중에는 함께 기억해주는 것으로 치유될 수 있는 일도 있다.
그런 아픔을 가진 사람에게 그냥 잊으라고 하는 얘기는 쉬운 위로이지만 또 다른 가해나 폭력이 될 수 있기도 하다.
좀 더 아픔을 가진 사람의 입장에서 그들을 헤아리려는 사회가 더 따뜻한 사회가 될 거라 믿으며, 나부터 잊으라는 말은 조심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