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한 살이 되던 해에 나는 군에 입대했다.
신병 훈련소에 입소할 때의 긴장도 상당했지만 훈련을 마치고 나서 처음 자대에 배치되었을 때의 긴장감이란 훈련소에서 겪은 긴장에 비해 훨씬 더 가슴 떨리는 기분이었다.
훈련소에서는 내무반 안의 모든 사람들이 입대 동기였기 때문에 그 안에서 위계질서라는 것이 없었고, 몇 주 후면 각자의 자대로 헤어지게 되는 사람들이라 누군가 맘에 맞지 않는 모습이 보이더라도 잠시 참으면 해결될 일이었다.
하지만 자대에 배치되는 순간 나의 포지션은 평등한 집단의 일원이 아니라 설국열차의 꼬리칸, 카스트 제도라면 불가촉천민쯤 위치에 있게 되는 것이었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 조금씩 후임병도 생기긴 하겠지만 처음 자대 배치를 받은 시점에는 몇 달 뒤의 일을 상상할 그런 여유도 없어서 그저 긴장한 상태에서 간부와 선임들이 어떤 사람들 일지 눈치 보게 될 뿐이었다.
처음 부대에 배치된 신병들은 당분간 내무반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각 잡힌 자세로 침상에 걸터앉아 선임들의 생활을 관찰하도록 되었다.
전입일로부터 이틀이 지난 일요일 저녁, 다른 내무반원들은 TV를 보며 웃고 떠들고 있었지만 나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주먹을 쥐어 무릎에 올린 차렷 자세로 앉아 반대편 침상 관물대만 바라보았고 TV 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TV를 보다가 저녁 점호를 앞두고 내무반 청소를 시작했을 때에도 신병에게는 일을 시키지 않았고, 나는 가만히 앉아서 선임들이 청소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내무반 청소는 계급에 따라 역할이 나눠져 있어서 이등병은 치약물을 풀어 침상을 닦고 일병은 관물대를 정리하고 상병은 빗자루와 마대로 내무반 바닥을 쓸고 닦았다.
그리고 병장부터는 청소로부터 열외 되어서 그냥 가만히 자리에 앉아 TV를 계속 보거나 잡담을 나누기도 하였다. 그럴 때 마침 신병의 존재는 한가한 병장들에게 재미있는 장난의 대상이 되었다.
츄리닝을 입고 반쯤 누워서 TV를 보던 박 병장이 "야 신병 너도 TV 봐"라고 얘기해주어서 나는 살짝 TV 쪽으로 고개를 돌렸지만, 이내 다른 편에 앉은 이 병장이 “야이 씨 무슨 신병 나부랭이가 TV를 쳐다봐” 하는 소리에 놀라 다시 정면의 관물대를 쳐다보게 되었다.
“야 이 병장 너무 그러지 마라. 쟤도 TV 보고 싶을 거 아냐?”
“에이 신병 군기 빠지게 하려고 그래? 말년이면 그냥 신경 끄고 있어요”
대화로 미루어 박 병장이 곧 제대를 앞둔 최고참 말년이란 점도 알 수 있었고, 이 병장이 실세 병장이란 것도 짐작이 갔다. 지금 나이가 되어서야 떠나가는 권력과 떠오르는 권력 사이에 누구 말을 들어야 할지 판단할 나이가 되었지만, 그때는 말년과 실세 사이에서 누구 말을 들어야 하는 건지 도통 알 수 없어서 엄청나게 눈치를 봤던 기억이 난다. 그들 역시 수시로 상반된 요구를 하면서 당황해하는 내 모습을 보며 웃던 게 기억난다.
그리고 그날 나는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고문관 같은 부끄러운 사고를 쳤다.
마침 일요일 아침 점호 때에는 옆 내무반의 허상병이 나를 포함해 대대에 전입한 신병 세 명을 불러놓고, 손바닥만 한 종이를 각각 건네주었다.
“신병들 내일까지 여기 적혀있는 병고참서열 다 외워놔라. 내일 아침 점호 때 물어봐서 틀리면 너희 새끼들 다 죽는 줄 알아”
병고참 서열은 같은 부대의 선임들을 입대 시점에 따라 순서대로 기록한 내용이었다. 사병 간에 지휘관계란 공식적으로 존재하지 않지만 실질적으로는 병고참서열이 일상 속 소통의 규칙과 기준으로 작동되었기에 그 시절 사병에게 암기와 숙지가 요구되는 정보였다.
하루새에 수십 명 부대원의 병고참서열을 모두 외우라는 지시는 매우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얼굴과 이름도 매치가 안되었는데 무조건 종이에 쓰인 이름과 입대 년월을 외우려니 쉽게 외워지지 않았다. 특히 병고참서열을 외우는 동안 종이를 꺼내서 대놓고 볼 수도 없고 손으로 써볼 수도 없이 머릿속에서만 외워야 해서 더욱 암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때 처음으로 군대에서 육체적인 고통 이외에도 다른 종류의 어려움이 있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고, 남들 다 갔다 온 군대가 이렇게 어려운 곳이었나 싶은 생각을 하게 되기도 했었다.
고참들이 청소를 하느라 내무반에 들락거리는 걸 볼 때에도 곁눈질로 그들의 계급장과 명찰을 훑어보고 병고참서열의 내용에 맞춰 머릿속에서 반복해 되뇌여서 암기하려 노력할 수 밖에 없었다.
‘저기 마대질 하는 사람이 1월 군번 상병 안병국, 1월 군번 상병 안병국, 저기 관물 정리하는 사람이 5월 군번 일병 이종호, 5월 군번.일병 이종호, …’
이렇게 머릿속으로 부대 선임의 얼굴과 서열을 맵핑시켜 기억하고 있을 때, 낮에 면회 왔던 애인과 함께 잠시 외출을 허락받아 부대 밖에 나갔던 나의 바로 위 고참 김경범 이병이 복귀해서 내무반으로 돌아왔다.
“충성 이병 김경범 외출 복귀했습니다.”
“어 그래 빨리 옷 갈아입고 이제 네가 본부중대 내무반 관물 마저 정리해라”
마대질을 하던 안상병은 이종호 일병을 자기 내무반으로 내보내고 김이병에게 남은 일을 맡겨서 역할을 정리해 줬다.
나는 그 순간에도 계속 병고참서열을 외우기 위해 선임병의 이름을 되뇌고 있었다.
‘저 사람이 그래 9월 군번 이병 김경범 이병 김경범 이병 김경범 …’
그때, 김이병은 침상을 딛고 올라오다가 살짝 휘청이면서 침상 끝에 차렷 자세로 앉아있는 내 어깨에 손을 짚었다. 바짝 군기가 들어있던 자대 전입 3일 차의 나는 선임의 손이 내 몸에 닿자 당연히 관등성명을 대야 한다고 생각했다.
즉각 큰 목소리로 관등성명을 입에 올리는 순간 나는 바로 나의 실수를 깨달았고 내 실수의 결과는 누군가에게 참혹한 결과로 이어졌다.
“이병 김경범”
병고참 서열을 외우느라 머릿속에는 내 이름이 아닌 김이병의 이름이 자리하고 있었고, 나는 내 이름이 아닌 김경범 이름으로 관등성명을 댄 것이었다.
마침 김이병 역시 아직 군기가 빡세게 요구되는 이등병이었고, 자신의 이름을 누군가 소리치자 그 연쇄반응으로 본인도 관등성명을 댔다.
“이병 김경범”
연달아 크게 소리쳐진 “이병 김경범” 관등성명 때문에 마대질을 하던 군기반장 안상병은 나와 김이병을 번갈아 쳐다보았고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가까이 걸어왔다.
“너희 뭐야?”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얼어붙었고, 김경범 이병은 “아무것도 아닙니다”라고 얘기하고 돌아서려 했지만 일이 안 좋은 방향으로 흘러갔다.
“뭐가 아무것도 아냐. 김! 경! 버! 미! 일루 와바라. 니 술 마셨나?”
“아닙니다.”
김경범 이병은 부인했지만 붉게 홍조 띤 얼굴과 미세한 알코올 냄새로 그가 거짓말을 하고 있단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야이 씨 이등병 나부랭이가 외출 나갔다 들어오면서 술에 취해서 들어와? 이 새끼가 간댕이가 부었구먼. 따라나와 이 새끼야.”
나는 내 실수 때문에 어쩌면 아무 일 없이 지나갔을 일이 커지는 걸 보면서도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계속 차렷 자세로 정면만 응시하면서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노력해야 했다.
점호 시작 조금 전에야 안상병과 김이병이 내무반으로 돌아왔고, 나는 묻지 않아도 이 사람이 어디 끌려가서 맞고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점호가 끝나고 모두들 자리에 누워 소등한 후 십여 분이 지났을 때, 내 바로 옆자리의 김경범 이병이 고개만 내 쪽으로 돌려서 조용히 물어봤다.
“야 너 아까 왜 내 이름을 불렀냐? ”
난 특별히 설명할 만한 마땅한 이유가 없었기에 그저 “죄송합니다.”라고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우리가 속닥거리는 소리를 듣고는 또 누군가 김이병을 불렀다.
김이병이 다시 안상병에게 불려 가 마저 맞고 올 때까지 나는 미안한 마음에 먼저 잠들 수가 없었다.
얼마 후 김이병이 다시 돌아와 옆에 누웠지만 다른 선임들이 다들 함께 자고 있는 내무반에서 내가 따로 미안한 마음을 전달할 방법도 없었다.
침낭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쓴 김경범 이병은 울고 있던 것인지 침낭이 들썩거렸고 난 미안함과 불안함에 쉽게 잠들 수 없었다. 조금 이따가 침낭 밖으로 고개를 뺀 김이병은 붉어진 눈으로 날 쳐다보며 아까의 일에 대해선 묻지 않은 체 조용히 건빵을 내밀었다.
"야 배고프지... 소리 안 나게 녹여 먹어라..."
"죄송합니다."
그날의 경험은 나에게 사람이 극도의 긴장감을 갖고 있으면 어떤 황당한 실수도 할 수 있는 것인지 알게 해 주었다.
낯선 공간, 미지의 사람들, 규칙에 대한 무지... 사람들에게 환경적 제약이 있으면 본연의 모습을 유지하기 힘들다는 것도 직접 체험해서 알 수 있었다.
수십 년이 지나고도 그때의 기억이 머릿속에 생생한 건 내 실수가 너무 황당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때문에 누군가 군부대 내 구타의 피해자가 되었다는 자책감이 컸기 때문이다.
이후의 부대 생활 속에서 대부분의 시간동안 김이병은 나에 대해 가해자의 위치가 되었다.
처음 만났을 때만 내가 의도치 않은 가해의 공범이 되었을 뿐, 나머지 시간은 당연히 후임인 내가 피해자일 수 밖에 없었다.
그렇지만 김이병에게 여러차례 얻어맞고 얼차려를 당한 기억은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데, 내가 그에게 힘든 경험을 안긴 기억은 오히려 선명하게 남아있다.
아마도 "때린 놈은 다리 못 뻗고 자도, 맞은 놈은 다리 뻗고 잔다"는 우리 선인의 말이 맞다는 증빙인 것 같다.
가끔 나의 황당한 실수때문에 심하게 얻어맞았던 김이병이 생각날 때는 그가 어디서 무얼 하고 살고 있든 나의 황당한 실수는 기억하지 않고 잘 살고 있으면 하는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