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후반 중고등 학교를 다닌 남자들이라면 오우삼 감독의 “영웅본색”이란 영화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지금의 한류만큼이나 당시 우리나라에 많은 문화적 영향을 끼친 홍콩 영화 중에서도 “영웅본색”이 갖는 위치는 가히 독보적이다. 대형 극장에서 개봉했던 영화가 아니었음에도 입소문을 타며 유명해지더니 동네의 동시상영관이나 비디오테이프 대여점을 통해 수차례 반복해서 "영웅본색"을 n차 관람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었다.
최근에도 TV 예능에서는 "영웅본색"의 OST가 쓸쓸하고 비정한 느낌을 표현하는 장면의 BGM으로 쓰이고 있고, 디지털 콘텐츠 구매에 인색한 나 같은 사람도 구글 플레이 무비에 "영웅본색"이 출시되자마자 추억을 위해 영구 소장판으로 구매했을 정도이니 그 시절을 추억하는 남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친 영화임에는 틀림없다.
물론 여자들도 당시 홍콩 배우에 관심이 컸지만 남자들이 그렇게 까지 특정 영화에 빠져들었던 건 전에 보기 힘든 사례였다.
당시 어린 남학생들은 영화에 출연한 주윤발의 옷차림을 따라 롱코트나 바바리를 걸치고, 장국영이 불렀던 뜻도 모를 주제가를 받아쓰기하여 ‘모아이 모농~ 깜띠 빅시~~~ 어쩌고’ 하고 따라 불렀다.
친구들과 영화 포스터를 흉내 내서 단체 사진을 찍으면서 마치 우리가 암흑가의 갱스터인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기분을 낼 때도 많았다.
영웅본색의 메가 히트 이후, 많은 홍콩 영화가 국내에서 상영되었고 그중엔 갱스터를 소재로 한 홍콩 누아르 작품들이 많았다.
‘강호정’, ‘열혈남아’, ‘첩혈가두, ‘정전자’ 등 수많은 조폭 소재 영화가 흥행했고, 동시에 국내에서 제작되는 영화 중에도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가 많아지기 시작했다.
그 시기 이후로 ‘초록물고기’, ‘넘버 3’, ‘조폭마누라’, ‘두사부일체’, '친구', ‘해바라기’, ‘신세계’, ‘불한당’, ‘낙원의 밤’, '강릉' 등등에 이르기까지 조폭을 소재로 한 영화는 꾸준히 제작되고 있고, 인기를 얻는 대중적 장르가 되었다.
한때는 너무나도 많은 조폭 소재 영화가 만들어지면서 극장에 가서 듣는 영화 대사의 대부분이 욕과 비속어인 경우도 있었다. 외국의 범죄 누아르 영화는 자막으로 이해하지만 한국 영화의 경우 대사의 뉘앙스가 그대로 전달되다 보니 너무 거친 욕이 반복되는 우리나라의 조폭 영화가 오히려 더 불편하게 느껴질 때도 많았다.
"영웅본색"에서 보였던 ‘의리’와 ‘형제애’라는 보편적 교훈조차 없는, 그저 잔인하기만 한 조폭 범죄 영화들도 많아지면서 한때 그 인기가 시들한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조폭 세계를 소재로 한 영화는 세월이 가는 동안 꾸준히 재창조되면서 그 인기를 이어오고 있다.
조폭 세계와 관련된 영화는 어떻게 이렇게 꾸준히 인기를 얻어가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지 궁금했던 마음에, 나는 개인적으로 그 이유를 여러 가지로 생각해 주관적인 기준으로 해석해 본 적이 있었다.
먼저 나는 조폭 세계에 대해 갖는 강한 호기심이 흥행의 이유가 된다고 생각했다.
일반인들 누구나 그 존재를 알고는 있지만 일상의 생활에서는 접하기 힘든 세계이다 보니 조폭 세계에 대해서는 궁금증이 생길 수밖에 없다. 항상 건너 건너 남의 입을 통해 전해 듣게 되는 어둠의 세계... 그 과정에서 과장된 전설 같은 얘기들이 호기심과 상상력을 자극하고 그 결과 조폭을 다룬 영화가 인기 있는 것이라고 생각되었다.
왜 누구나 학창 시절에 한 번쯤은 동네에서 17:1 싸움 같은 누군가의 전설 같은 얘기를 듣게 되는 경우도 있지 않나. 그런 경험들이 마음속에 쌓여있다가 영화에서 유사한 스토리를 경험하면 반갑다거나 저런 일도 있구나 하는 새로움으로 느껴진다고 생각했다. (박건형 배우가 주연한 '뚝방전설'에선 18:1 싸움 전설이 영화의 소재가 된다)
다음으로 현실감 있는 액션 역시 조폭 영화의 흥행 요소라고 생각했다.
전쟁물이나 히어로를 다룬 영화들의 경우가 조폭 영화에 비해서 액션의 스케일이 훨씬 큰 건 분명하다.
하지만 블록버스터급의 액션은 너무 엄청난 규모로 인해 그런 장면이 현실이기보다는 영화 속 상황임을 분명히 인지하게 된다. 이런 류의 영화에서 수많은 초고층 건물이 무너지고 도시가 파괴되지만 개개인의 피해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는다.
하지만 조폭 영화를 보면 그 액션의 방식이 리얼하고 현실적인 타격감이 느껴져서, 집중해 보다 보면 마치 내가 때리고 맞아서 아픈 것 같은 기분을 경험하게 된다. 그래서 그런 액션의 현실감이 다른 장르물과 차별화되기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중요하게 생각한 조폭영화의 인기 이유는 조폭 세계에서 갈등을 해소해가는 과정에서 느끼는 대리 경험의 카타르시스였다.
사실 학생이든 직장인이든 간에 자신이 소속된 학교와 직장이라는 조직 내에서 아무런 갈등 없이 생활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표출되는 방식과 갈등의 수위만 다를 뿐이지 일상 속의 조직에도 암흑가의 조직처럼 내부의 갈등은 항상 존재하는 법이다.
그런 갈등이 조폭이라는 조직에 투영되면 갈등의 구조가 더욱 선명해지고, 해결의 방법도 폭력이라는 극단적 수단으로 이뤄지면서 자신의 감정을 주인공 중 누군가에 이입하여 느끼는 카타르시스가 있고, 그게 조폭 영화의 인기 요인이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비록 조폭 영화는 아니지만 권상우 배우는 '말죽거리 잔혹사'에서 같은 시절 학교를 다닌 남학생들의 가슴속에 꿈틀대던 정의감과 영웅심을 담은 대사를 내뱉었다. 친구들을 괴롭히고 폭력을 행사하는 선도부장에게 소리친 "XX놈아 네가 그렇게 싸움을 잘해? 옥상으로 올라와!"라는 대사가 그것이다.
아마도 많은 학생들이 자신의 생활 경험 속에서 어떤 불량학생을 떠올리며 마음속으로 수도 없이 삭혀본 얘기였을 것이다. 현실에서는 쉽게 하기 힘든 일을 영화에선 용감하게 저지르고 악인을 통쾌하게 응징하는 모습은 억눌린 감정을 가진 사람들에게 판타지적 경험을 안겨준다.
흥행에 성공한 조폭 영화 속 주인공들은 대체로 자기가 속한 조직 내에서 배신을 당한 사람인 경우가 많았다. "영웅본색"의 '적룡'과 '주윤발' 배우는 모두 몸담았던 조직에서 배신당해 밑바닥으로 추락한 사람이었고, 작년에 넷플릭스로 공개되었던 박훈정 감독의 '낙원의 밤'에서도 엄태구 배우는 보스에게 속아 위험한 미션을 수행하지만 이용만 당한 체 결국 자기가 모셨던 보스의 손에 죽임을 당한다.
박훈정 감독의 전작인 '신세계'에서도 이정재 배우는 경찰 출신의 언더커버 형사이지만 경찰 조직에서 보호받지 못하고 살기 위해 어두운 조직의 세계로 확실한 전향을 선택하게 된다.
조직을 배신한 사람보다는 조직으로부터 배신을 당한 사람이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은 어쩌면 실제의 사회에서도 자기가 속한 조직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도 배신당했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아서가 아닐까 생각한다.
90년대 후반 IMF 사태 이후, 평생고용의 신화가 산산이 깨어지면서 조직에서 버림받은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아진 것도 어쩌면 영화 속에 배신당한 주인공이 많이 등장하는 하나의 이유가 아닐까 생각한다.
조직 안에서 "을(乙)"로 살아가던 평범한 소시민이 오랫동안 성실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조직 내에서 부당한 처분을 받는 경우는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과 겹쳐 보인다.
조폭 세력의 중간보스로 나왔던 이병헌 배우는 보스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스스로는 추측할 수도 없던 이유로 조직에서 내쳐지고 나락에 떨어져서 보스에 대한 복수에 나선다.
복수의 끝에서 만난 자신의 보스에게
“말해봐요 나한테 왜 그랬어요?” 묻지만 보스의 대답은 어떻게 보면 허무하기까지 하다.
“넌 나에게 모욕감을 줬어”
실제 기업과 같은 일반적인 조직 내에서의 상하관계를 상상해 보면, 자신의 상사가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자신을 몰아붙여 불이익을 준다고 해서 이병헌 배우처럼 상사에게 직설적인 질문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 수 있을까?
어쩌면 조폭 사회보다도 더욱 관료화된 계급 사회가 직장이라는 조직일 수 있고, 그 안에서 질문할 수 있는 권리는 보통의 경우 상사에게 즉 권력자에게 주어진다.
그러니까 조폭 영화는 현실 조직에서 경험할 수 있는 갈등을 현실에서는 하기 힘든 방법으로 해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조직생활 문제 해결 판타지"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선공후사(先公後私)나 멸사봉공(滅私奉公) 같은 사자성어가 익숙한 우리 사회에서는 조직에 충성하고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게 사회의 암묵적 합의로 느껴진다. 하지만 조직이 항상 개인보다도 더 도덕적이고 올바른 판단을 하는 게 아니란 것은 사회의 역사가 알려주고 있다.
그러니까 조직에 비해 당연히 언더독일 수밖에 없는 개인이 거대한 조직에 대항하여 통쾌하게 복수하는 줄거리의 영화에 우리가 흥분하고 응원하며 보게 되는 게 아닐까 싶다.
현실의 복잡한 이해관계를 단순화하여 선과 악을 대조시킴으로써 갈등을 극대화하고, 그 해결 역시 폭력을 이용해 끝장낸다는 점에서 조폭 영화는 마치 바다를 담아 보여주는 수족관 같은 느낌이다.
앞으로 또 어떤 조폭 영화가 내 인생의 경험을 투사해 볼 수 있는 영화로 만들어져 기억 속에 선명하게 위치하게 될 지 조용히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