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수의 자격

by 랜덤초이


한 번은 회사가 중요한 의사결정을 앞두고

회사 내 각 사업부문에게 해당 의사결정이 이뤄지게 되면 어떤 성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 지에 대해 목표를 취합한 일이 있었다.

어떤 사업부문은 현실적인 목표를 예측하고 어떤 사업부문은 의지를 반영한 황당한 목표를 제시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각 조직의 목표치를 내가 취합하여 종합 보고하기로 했던 터라 이런 숫자를 어떻게 정리하지 걱정이 되었다.

산정 근거도 의지의 정도도 부서에 따라 제각각 어떤 경우는 상식적으로 이해가 어려운 희망섞인 수치 목표가 제시되기도 했으니 더욱 그랬다.


그런 조직들의 눈치를 느껴서인지 CEO는 애초에 계획된 취합 보고 방식을 바꿔 각 사업부문이 직접 추정 목표를 제시하고 그 근거를 설명하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신기하게도 너무 보수적이라고 느꼈던 부서는 목표를 높여서 가지고 오고 너무 낙관적이던 부서는 거꾸로 목표를 낮춰서 가지고 오는 일이 벌어졌다.
누가 CEO 앞에서 입을 떼어 보고하고 챌린지 받을 것인가에 따라 추정 목표가 바뀌니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과정 속에 회사의 중요한 의사결정이 마무리되지 않은체 회사의 CEO가 교체되었다.

나는 전임 CEO가 추진하던 프로젝트를 새로 부임한 CEO에게 설명하게 되었고, 추진 목적과 진행 경과에 이어 이전에 보고되었던 각 사업부문의 사업 목표를 보고했다.


당연히 전임 CEO에게 최종 보고했던 목표와 동일한 내용을 보고했는데 신임 CEO는 프로잭트 비용 대비 기대 목표 수준이 너무 낮은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간의 확인 결과와 추정 로직을 고려하면 지금 제시된 목표도 사실 희망섞인 낙관적 수준이지만 그 정도로는 신임 CEO가 의사결정을 하기에 부담이 되었던 것이다.


신임 CEO가 프로젝트의 기대효과가 낮은 이유로 의사결정을 어려워하는 눈치를 보이자 한 사업부문장이 나서서 나를 가리키며 얘기했다.


“저 친구가 보수적으로 판단하는 경향이 있어서 그렇지 사실 의사결정이 되어 프로젝트가 진행되면 저희 사업부문에서는 더 큰 성과를 낼 수 있습니다.”


나와 그 얘기를 들은 다른 사업부문장들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이미 수차례 논의를 거쳐서 사업부문 스스로도 달성하기 어려운 수준이라던 도전적 목표를 내놓고는 종합해서 보고한 나 개인의 성향 때문에 보수적으로 왜곡된 수치라고 얘기하니 당황스러운 게 당연하다.




보고 자리를 마치고 그렇게 얘기한 사업부문장을 찾아갔다.

정중하게 “제가 miss 한 부분이 뭔지 알려주시면 새로이 목표에 반영하겠습니다.”라고 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그 사업부문장은 이런저런 이유로 내게 시간을 내주지 않았고 결국 집무실 밖에서 기다리다가 다른 회의를 위해 이동할 때 따라 들어가 물어봤다.


“부문장님 아까 CEO께 얘기하신 추가적인 기대 성과가 뭔지 알려주시면 제가 정리해놓겠습니다.

혹시 바쁘시면 사업부문 내 누구와 상의할지 알려주시면 제가 얘기하겠습니다.”


내 말을 들은 부문장은 귀찮다는 듯 이야기했다.


“그런 게 어딨어 선수끼리 왜 그래?”


그때 알았다 …


그는 선수였고 나는 선수가 될 수 없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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