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구에 위치한 전통시장인 영동시장 근처 강남대로변에는 지금은 사라진 소규모 개봉관이 있었다. 처음 생겼을 때의 이름은 “다모아 극장”이었는데 3개의 개봉관이 있는 나름 멀티플렉스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극장은 나중에 소유주가 바뀌면서 “뤼미에르 극장”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처음 극장명이 바뀌었을 때는 “뤼미에르”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때라서, “다모아”라는 친숙한 이름을 뜻도 모를 외국어로 바꾼 것이 못내 아쉬웠었다.
나이 들고서야 “뤼미에르”가 카메라 겸 영사기를 발명하여 영화의 시조라 불리는 프랑스인 형제의 이름인 것을 알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인터넷이 활성화되기 이전이라서 궁금한 걸 쉽게 찾아보기도 힘든 시절이었다.
당시 영동시장 주변은 강남의 다른 지역에 비해 음식값도 저렴했고, 특히 (지금은 사라진) 뉴욕제과로 대변되는 강남역 상권의 번화함에 비해서는 한적한 느낌도 있었기에 친구들과 자주 찾게 되는 곳이었다.
이제는 영동시장 주변도 강남역 상권과 다름없이 많은 젊은이들이 붐비는 곳이 되었지만 그래도 높은 빌딩군에서 조금은 떨어져 상대적으로 소박한 느낌이 있는 것은 여전하다.
나는 요즘도 친구를 만나면 영동시장 근처를 찾는 경우가 많고, 친구와 전화통화를 하면서 만날 장소를 설명할 때는 "옛날에 다모아 극장(뤼미에르 극장) 있던 곳에서 더 신사역 쪽으로 올라오면..." 하는 식으로 길을 설명하고는 한다.
분명 강남권에 있는 나름 멀티플렉스 영화관이었지만 좀 더 교통이 편하고 시설이 좋은 영화관들이 많이 생기게 되면서 영화를 보기 위해 다모아 극장을 찾는 일은 줄어들게 되었다.
강남역에 인접한 동아극장과 씨티극장 그리고 삼성역에 생긴 메가박스 등의 극장이 인기를 끌면서부터는 다모아(뤼미에르) 극장을 찾는 사람은 더욱 줄어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게 다모아 극장에 대한 기억이 새록새록한 것은 그 영화관에서 본 영화 그리고, 극장에서 겪었던 에피소드가 잊지 못할 추억이 되어있기 때문이다.
내가 다모아 극장에서 본 영화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영화는 “하워드 덕”이란 영화이다.
오리처럼 생긴 외계인 하워드가 지구에 와서 겪는 일을 그린 영화였는데 자세한 줄거리는 기억나지 않지만 여주인공 ‘비버리’ 역을 맡았던 '리 톰슨 배우'가 인상에 깊게 남았었다.
영화 자체로는 최악의 영화와 배우를 선정하는 '골든 라즈베리 시상식'에서 최악의 작품상, 최악의 각본상, 최악의 신인상, 최악의 특수효과상을 수상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런 세간의 평과 관계없이 '리 톰슨'이 영화 속에서 보여준 매력은 나와 그리고 함께 본 친구에게 할리우드에 팬레터 보내는 걸 고민하게 할 정도로 크게 기억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이 브룩 쉴즈, 피비케이츠, 소피 마르소 같은 여배우를 책받침 여신으로 추앙했던 시절이었지만 '하워드 덕'에서 보여 준 '리 톰슨'의 매력은 왠지 그들과 다르면서 더 현대적인 느낌이었다.
요즘 같으면 인스타 DM을 보낼 수도 있으니 쉽게 연예인에게 마음을 전달할 수 있을 텐데, 옛날엔 진짜 팬심이 컸어도 표현할 방법이 없는 답답한 시절이었기에 지금보다 팬심을 전달하기 위해서는 훨씬 더 많은 노력과 정성이 필요하던 시절이었다.
다모아 극장을 기억하는 또 다른 이유는 영화가 아니라 '뤼미에르 극장' 시절 상영 대기 장소에 놓여있던 인형 뽑기 크레인 기계 때문이다.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와 여자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갔을 때였다.
극장의 인형 뽑기 기계에는 인형도 있었지만 맥가이버 칼과 터보 라이터 등의 경품도 들어있었다.
사행성을 조장하는 경품들이 들어있다 보니 보통 그런 기계에서 경품을 뽑는 건 일반 인형을 뽑는 것보다 더 힘들게 만들어 놓는 경우도 있었다.
영화 시작을 기다리며 시간이 남는 동안 잠시 여자 친구가 화장실에 갔고, 마침 경품뽑기 기계 주변엔 사람들이 없길래 주머니 속의 500원 동전 두 개를 넣고 기기를 조작해보았다.
당연히 꽝일 거라는 생각을 하며 기대하지 않았는데 운 좋게 박스 하나를 뽑는 데 성공했다.
주변애서 구경하던 사람들까지 박수를 쳐주는 분위기 속에서 뽑혀 나온 경품을 보니 당시 유행했던 "터보 라이터"였다.
비록 담배를 태우지는 않지만 흡연을 하는 친구나 부대 동기에게라도 선물로 줄 수 있겠다 싶었고, 단돈 천 원으로 수만 원쯤 하던 터보 라이터를 뽑은 게 무척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불이 붙는지 확인하기 위해 라이터를 조작해보니 가스가 없어서인지 점화 소리만 날 뿐 불꽃이 보이지 않았다. 속으로 생각하길 '역시 공공장소에 설치된 기계 안에 경품으로 들어가 있는 라이터이다 보니 안전을 위해 가스는 충전해놓지 않은 거구나' 하고 생각을 했다.
그렇다면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기 위해서는 내가 가스를 사서 충전해줘야 하나 생각하며 재확인을 위해 라이터를 코에 가져가 켜보았다.
가스 냄새가 나지 않는 걸 확인하려 했을 때 터보 라이터 특유의 강한 불꽃이 방사되는 "슈우욱" 소리와 함께 코밑으로 살짝 파아란 화염을 본 건 같았다.
얼른 라이터를 코에서 뗐지만 콧속에 뜨거운 기운이 느껴졌고, 마침 화장실에 다녀오던 여자 친구가 보여서 콧구멍을 데었다는 것으로 호들갑을 떨 수도 없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자연스레 상영관 안으로 들어가서 영화를 보는 동안, 마치 오징어와 종이가 탄 것 같은 냄새가 계속 콧속에 맴돌았고 조심스레 콧구멍을 만져보면 타버린 코털이 재가 되어 부스러져 나왔다.
창피해서 차마 얘기할 수도 없이 영화 보는 내내 티 나지 않게 타버린 코털의 재를 털어내야 했던 기억이 있어서인지 영동시장 주변에 갈 때마다 극장의 추억이 다시 선명하게 생각나고는 한다.
강남에 오래 사는 동안 지역 내 유명했던 대표적인 건물이 사라지고 다른 건물이 들어서는 걸 종종 볼 수 있었다.
대학시절 압구정동 맥도널드, 이대 앞 웬디스, 대학로 KFC와 함께 4대 바보 스테이지로 불렸던 강남역 뉴욕제과도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제일생명 사거리는 교보타워 사거리로 바뀌었고, 돼지갈비로 유명했던 영동시장 근처 먹자골목은 한신포차 거리 또는 백종원 거리로 불리다가 이제는 또 다른 변화가 진행 중이다.
낯익고 기억에 남은 옛 추억의 노포들이 사라지는 건 당연한 시대의 변화이겠지만, 누군가에게는 특별한 기억이 있고 소중한 추억이 있는 장소들이 이렇게 글로라도 남아서 또 다른 사람들이 그 시절과 그 장소를 추억해볼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