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정 인물 추리하기

by 랜덤초이


최근 "스물다섯 스물하나"라는 드라마를 아주 재밌게 봤다.

배우들의 연기도 훌륭했고 1998년부터 시작되는 드라마의 시대적 배경 역시 나의 추억과 맞닿아 있어서 더욱 몰입하게 되었던 것 같다.


마지막회의 결말이 맘에 들지 않아 가슴이 아팠고 그런 마음을 정리해보려 드라마의 두 주인공이 이별했던 촬영 장소(팔달공원)를 찾아가 드라마가 현실이 아니란 점을 자각하려 했을 정도로 몰입이 과했다.


드라마에는 내가 겪었던 시대의 기억이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1화의 '스크린쿼터 반대 시위'와 '은행 간 합병'부터

15-16화에 이어져 나온 '9.11 테러'까지... 머릿속에 그리고 가슴속에 기억된 일들이 드라마의 소재로 나오게 되니 더욱 현실의 이야기로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현실의 사건과 인물을 연결해서 떠올리게 되는 드라마의 경우 법적 문제나 괜한 시비를 회피하기 위해 드라마 시작 전에 사전 고지를 하는 경우가 있다.


이번 드라마의 경우,

"본 드라마의 인물, 기업, 단체, 지명, 행사, 경기, 사건 등은 실제와 무관하며 창작에 의한 허구임을 알려드립니다"라는 글이 표시되었다,


저런 글이 쓰여있어도 사람들은 굳이 드라마 속의 내용이 어떤 현실 속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인지를 대강 추정하고 확신하게 된다.

"스물다섯 스물하나" 1화의 도입부엔 여주인공 나희도가 소속된 고등학교 펜싱부가 해체된다. IMF로 인해 시대가 꿈을 빼앗았다는 내레이션이 이어지는 중의 배경화면에는 어느 은행에서 펼쳐지는 현수막을 비춰 보인다.


"보름은행은 한아은행과 1998.7.4부로 통합되었습니다."


아마도 당시를 기억하는 사람이라면 보름은행은 '보람은행', 한아은행은 '하나은행'의 이름을 비틀어 쓴 것이란 걸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뻔히 뭘 생각하고 촬영한 내용인지 알겠는데 굳이 이름을 바꿔놓았다고 생각하기에, 원래의 이름을 추측하는 과정은 너무 쉽게 느껴지고 어떨 땐 유치한 비틀기가 웃음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비슷한 시기를 배경으로 한 "응답하라 1994"에서 신촌 하숙집 주인인 배우 성동일 씨는 서울 연고의 프로야구팀 코치로 나온다.

유니폼 디자인을 보면 누가 봐도 "LG 트윈스"이지만 드라마에선 "서울 쌍둥이"였다.

주인공 중 한 명인 '칠봉이'에 대한 야구선수로서의 서사는 당시 연세대 에이스였던 임선동 선수의 이미지를 차용해 온 것으로 보였다.


드라마의 인물, 사건과 실제 인물의 관계를 찾고 그 싱크로율을 비교하는 것 자체가 드라마라는 창작물을 즐기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하다 보니, 다른 사람은 눈치채지 못할 것 같은 창작과 현실의 특정한 관계를 추측해보는 것이 탐정의 추리 과정처럼 즐거웠다.


2020년 말 일본에서는 3대 메가뱅크(Mega Bank)로 불리는 "미쓰비시 UFJ"의 신임 은행장 취임으로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통상의 관례를 벗어나 상무에서 바로 신임 은행장으로 취임한 사람의 이름은 "한자와 준이치", 일본의 국민 드라마라고 평가받은 동명 드라마의 주인공과 "한자와"라는 이름이 같았기 때문이다.


거대 은행 안에서 펼쳐지는 부조리와 부정 속에서 정의로운 신념으로 난관을 극복해가는 주인공의 이름이 바로 "한자와 나오키"였다. 마침 드라마의 원작 소설을 쓴 "이케이도 준"이 그 은행에 다닌 경력이 있었기에 사람들의 추측은 확신처럼 번졌었고, 당사자들의 부정에도 불구하고 "한자와 나오키" 실존인물설은 정설처럼 소문이 퍼져갔다.


만약 싱크로율이 높다면 그래도 다행스러운 건 "한자와 나오키"가 드라마에서 빌런이 아닌 히어로 쪽 사람이란 점이다. 작중 히어로가 실제의 사회에서도 인정을 받은 것이구나 하는 생각을 할 수 있으니 말이다.

거꾸로 드라마 속에 빌런으로 인상 깊던 "오오와다 아키라" 상무가 실제의 이름으로 은행장이 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면 사람들이 얼마나 실망이 컸을까 생각하면 끔찍하기까지 하다.


대부분의 창작물이 100% 허구라기보다는 실제의 경험이나 현실에서 모티브를 찾는 경우가 많다 보니 누군가는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자신의 경험과 기억에 비추어 각자만의 특정 인물과 특정 사건을 대입시켜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게 되곤 한다.

그게 작가의 의도이든 아니면 아무런 생각 없이 전달된 내용이든, 해석하는 사람이 그런 이해의 과정을 머릿속에서 하는 건 자유이고 자연스럽다.


그리고 작가가 의도를 가졌을 땐 그걸 알아차려주는 독자와 시청자가 있어야 작자도 내심 기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의 경우에도 글을 쓸 때는 분명히 누군가를 특정하여 그 사람과 있었던 일이나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적을 때가 있다. 좀 더 필력이 생긴다면 복잡한 기억 속의 일들을 소재로 해서 "한자와 나오키" 같은 소설을 써보는 게 나의 꿈이다.


그리고 누군가 내가 쓴 글 속에 숨겨진 특정 인물과 사건에 대한 현실과의 싱크로율을 찾아내는 추리에 나서 준다면 너무 설레고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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