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비늘 제거

by 랜덤초이


“역린(逆鱗)”이란 단어는 제법 어려운 한자어(漢字語) 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들어본 적 있는 단어일 것이다. 배우 현빈이 주연한 영화의 제목이기도 했거니와 정치 뉴스에서도 자주 사용되고 일반 직장 같은 조직에서도 흔히 쓰이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단어의 뜻을 한자 그대로 해석하면 ‘거꾸로 돋은 비늘’을 얘기한다.
군주(君主)와 비유되는 상상 속의 동물인 “용”에게는 비늘이 있는데, 그중 목 주변 단 하나의 비늘은 거꾸로 돋아 있고 이 비늘을 건드리면 용의 노여움을 사서 죽임을 당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린"이란 절대로 건드리면 안 되는 권력자가 가진 금기 같은 의미이다.


이와 같은 내용은 중국 전국시대의 법가 사상가인 한비자(韓非子)의 글에서 유래한다.

한 시대를 풍미하는 유행어라는 게 있기는 하지만 도대체 '역린'이란 단어는 왜 그리 오래도록 인구에 회자되는 것일지 궁금한 마음이 들어 단어가 기술된 원문의 내용과 해설을 찾아보게 되었다.


"역린"은 한비자 세난(說難) 편에 나온다.

세난이란 말은 군주에게 자신의 의견을 설득하는 유세(遊說)의 어려움을 뜻하는 말이라고 한다.

사실 요즘 시대의 회사에서도 사람들은 CEO에게 보고를 하는 경우 상당한 어려움과 부담을 느낀다.

그냥 내가 주장하는 내용을 전달하는 자리라면 불편할 게 없겠지만, 보고라는 형식은 결국 보고를 듣는 사람의 interest에 부합되어야 의미 있게 전달되기 때문이다.


한비자는 ① 명예를 중시하는 군주에게 이익으로 설득하면 천하다고 판단될 것이고, ② 이익을 중시하는 군주에게 명예로 설득하면 멀어지게 될 것이라 하였다.

이 얼마나 현실의 조직 생리와 맞닿아있는 비유인가 싶다. 아니 어쩌면 조직의 생리는 시대가 지나도 바뀐 적이 없을 것이다. 듣는 사람의 관심과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설득은 백이면 백 실패하는 게 명약관화하니 말이다.


그러나 상사를 설득하기 어려운 이유 중에는 사실 상사들이 자신의 진정한 interest를 감추고 있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속내를 숨긴 권력자는 자신의 의중에 대한 해석을 부하에게 미루고 그 결과에 대한 책임을 지려하지 않는다.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대통령은 중앙정보부장에게 얘기한다.

"임자 옆에는 내가 있잖아. 임자 하고 싶은 대로 해."


어찌 보면 대단히 권한을 위양 해주는 말 같지만 사실 저런 말의 이면에는

"대신 내 맘대로 결과가 이뤄지지 않으면 책임은 네가 져야 한다."라는 뜻이 숨어 있다.

그러니까 상사인 권력자의 의중을 파악해 그에 100% 맞는 보고만 할 수 있는 방법이란 없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지 않을까 한다.


그래서 많은 경우 상사의 의중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으면 할 수 있는 방법은 하나뿐이다.

바로 내가 군주나 CEO라면 어떻게 해야 하는 가를 심각히 고민하고 그런 최선의 내용을 제안하는 게 정직한 방법이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러다가 내가 생각한 최선이 상사의 역린을 건드리게 되면 뭐 어쩔 수 없지 않은가.

죽는 수밖에...

지금 봐도 놀랍도록 현실 세계를 명쾌히 관통한 한비자의 식견이지만, 그 역시 진나라에 가서 진시황을 설득하려다 처형되는 비극적 결말을 맞지 않았던가 말이다.


나는 한비자가 "역린"을 얘기한 게 그런 걸 미리 알고 피하라는 의미라기보다는 그런 이유로 죽임을 당할 일이 생길 수도 있다는 사전 안내의 성격으로 읽힌다.


그래도 해야 할 말은 하는 사람들이 어느 시대에 건 꼭 있다.

모두가 윗사람의 눈치만 보면서 보신을 꿈꾸는 세상이 어떻게 살기 좋은 세상이 될 수 있을까 말이다.

그나마 요즘 세상엔 역린을 건드리는 게 무슨 중범죄도 아니고 죽을 일도 아니지 않은가.

그러니까 부당한 일에는 오히려 더 당당하게 그게 역린인지 뭔지 상관 말고 의견을 낼 수 있는 사람이 더 많아지면 좋겠다.





한비자에 관한 글을 읽다가 그가 "나라가 망하는 47가지 사례"를 제시 해던 것을 알게 되었다.


무슨 31가지 종류의 아이스크림도 아니고 나라가 망하는데 47가지 씩의 사례가 있을까 했지만 호기심으로 읽어보다 보니 참 그럴듯하기도 하고, 요즘 생활 속에서 보는 나라와 회사일에서 비슷한 사례도 눈에 들어와 신기하고 불안한 마음도 드는 게 사실이다.


여러 사례 중 특히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던 내용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十六. 나라 안의 뛰어난 선비를 중용(重用) 하지 않고 나라 밖의 사람에게 관직과 봉토(封土)를 주며, 공로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명성만을 좇아 진퇴를 결정하며, 다른 나라에서 데려온 사람만을 믿고 그 지위를 높게 하여 나라 안의 신하들보다 귀하게 만들면 그 나라는 망한다.

(증명되지 않은 외부 전문가를 빌어 책임 없이 권한을 행사하게 하는 꼴은 지독히도 되풀이된다)


二十一. 겁이 많아 자기 신념대로 나라를 지키지 못하고, 지레짐작은 재빨리 하면서도 마음이 유약하여 정작 결단을 내려야 할 때 망설이다가 때를 놓치면 그 나라는 망한다.

(사석에서는 조직의 문제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들이 정작 필요하고 책임질 때는 입을 다무는 사람이 너무 많더라)


二十七. 임금이 조그마한 술수로 법을 어긋나게 만들고, 사사로운 일로 공사(公事)를 그르치게 하며, 법률과 금령을 쉽게 바꾸고,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명령을 내려 백성들이 어느 쪽을 따라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나라의 중요한 법을 바꾸는 것도 한 달이 안 걸려 해치우는데, 회사의 기준이야 뭐 말이 곧 법이 되더라)


四十五. 새로 조정에 나온 신하가 높은 자리에 오른 반면 옛 신하들은 밀려나고, 어리석은 사람이 나랏일에 중용(重用)되는 반면 어진 선비는 드러나지 않고, 공적이 없는 사람은 귀하게 되는 반면 고생해 공로를 세운 사람은 천한 대우를 받는다. 이 때문에 지위가 낮은 사람들은 고관대작(高官大爵)을 원망하게 된다. 지위가 낮은 사람들이 원망하게 되면 그 나라는 망한다.

(진정성 없이 광만 팔아도 성공하는 인사평가가 이뤄지면 앞에선 축하하고 뒤에선 뒷말이 나오더라)


누가 한 말인지 모르겠지만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고 같은 실수를 되풀이한다." 란 말은 가끔씩 소름 끼치게 정확하다고 느껴진다. 역사를 배워야 하는 이유로 이만큼 정확한 근거가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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