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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Oct 22. 2020

일주일에 3일은 가정주부로 산다

학교 강사이자 프리랜서로 일하고 있는 요즘.

화요일과 목요일은 아침부터 허겁지겁 어딘가에 가지 않아도 된다.


퇴사 후 처음엔 남들처럼 아침에 바쁘지 않아도, 출근 전 날 우울하지 않아도 돼서 좋았다.

그러나 한 달이 지나니 출근하지 않는 화요일과 목요일은 무기력감이 찾아왔다.

아침 11시까지 침대에서 벗어나지 않아서였을까.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 출근하지 않는 날이면, 별로 지저분하지도 않은 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방 청소는 점점 집 청소가 됐다.

뭐라도 깔끔하게 끝내 놓아야, 그 시간에 밥벌이하는 세상 사람들 앞에서 조금이라도 무안하지 않기 위해 뭐라도 해야, 그래야 마음이 편해져서였을까.


집 청소를 하다 보면 버릴 게 많다.

먹다 남은 음식들, 음식을 담고 있던 플라스틱들, 플라스틱들을 포장하고 있던 종이들.

어릴 땐 보기만 해도 싫던 음식물쓰레기도 내다 버린다. 싱크대 거름망에 쌓인 음식물들도 깔끔히 털어내고 세제로 닦아 배수구로 흘려 보낸다.

가끔씩은 뜨거운 물도 부어본다.


분리수거도 잊으면 섭하다.

매주 목요일마다 돌아오는 분리수거일을 대비해 버릴 쓰레기들을 차곡차곡 쌓는다.

더 깔끔하게 버리기 위해서 궁리한다. 쓰레기를 담는 분리수거 바구니도 바꿔본다.

그러다 과일 포장재는 분리수거가 안 된다는 사실도 알게 된다.


목요일 아침 분리수거할 쓰레기들을 바리바리 싸서 나가다가 15층에 사는 아주머니를 만난다.

인사만 나누던 사이였다. 이젠 흰머리도 봐드리고 아파트 헬스장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도 공유한다.

얼마 전엔 욕실에서 넘어지셔서 머리가 살짝 찢어졌다는 근황에 연고와 반창고도 붙여 드렸다.

“7층 아줌마보다 총각이 낫다” 황당한 칭찬도 들어본다.


오늘도 어김없이 분리수거를 했다.

분리수거하는 곳에서 박스를 차곡차곡 쌓고 있는데, 건너편 동에 사는 내 또래의 남자와 눈이 마주친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처지를 알겠다.

빈 바구니를 탈탈 털고 돌아서며 괜한 안심 반, 나보다 나으려나 하는 불안 반.


집 청소와 정리를 마치고 헬스장에 들른다.

아주머니들 수다가 현관을 박차고 나온다. 나도 못 낄 거 없다는 생각을 해본다.

러닝머신을 뛰며 티비를 틀면 ‘속풀이쇼 동치미’가 나온다.

뉴스와 동치미쇼, 홈쇼핑, 때 지난 연속극. 이 시간대 방송 편성표는 그렇다.


가정주부 발끝에도 못 미치는 살림 실력, 살림이라고 하기에도 민망한 매주 집 청소와 분리수거는 언제부터 가정주부의 영역이 되었을까.

특정 시기를 상정할 수 없겠지만, 내가 집에 있어보니 왜 하는지는 알겠다. 안 하고는 좀이 쑤신다.

몸이 바쁜 일이라 그런지 시간 가는 줄 모르는 재미도 있다. 말끔해지는 집과 더불어 맑아지는 정신은 덤이다.

물론 매번 그렇지는 않다. 오랜만에 자기위로 기제가 작동한 걸까.


일찍 일어나 청소를 하니 오후엔 할 게 없다.

가을길도 걷고 싶고, 서점에 가서 책도 읽고 싶다.

괜히 구청 주관 미술반, 문화센터 주관 꽃꽂이 클래스가 문전성시인 게 아니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 그리고 토요일은 하루의 문법이 다르다.

벗어나고 싶지만 적응해가는 것.

텅 빈 하루에서도 규칙과 즐거움을 찾는 것.

그게 나의 가정주부 문법이다.



(C) 메인커버, SBS 드라마 <불량남녀> 극 중 배우 손창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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