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경을 벗다가 마스크가 벗겨졌다.
틈새로 들어오는 시원하고 신선한 공기. 자연스럽게 하늘을 보게 된다.
마침 오르막길에 있었는데, 교정 옆으로 빨갛게 물든 단풍들이 시선을 잡아 끈다.
나뭇가지 위에 핀 단풍잎만 봤지, 나무를 타고 덩굴처럼 피는 단풍은 처음 봤다.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날씨 좋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뇌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도 보고 여기저기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도 본다.
바람 잘 통하는 옷을 입고 나선 것 같은 상쾌!
알록달록한 꽃과 나무들이 하루의 시작을 응원하는 것 같다.
괜시리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교과서 말고 사는 얘기 한 번, 꿈 얘기 한 번 해본다.
출근길에 본 단풍들이 아른거려 홀린 사람처럼 다시 단풍길 앞에 서본다.
단풍잎 몇 장 주워서 책갈피로도 쓰고, 소소한 선물로도 줘야겠다고 다짐한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책을 읽고 있는데, 건너편에 앉은 선생님이 같이 뒷산 산책을 가자고 한다.
마침 단풍 얘기를 꺼낼 참인데 선생님이 선수를 친다.
"봉산(뒷산)에 핀 단풍 보셨나요. 이쁘죠."
올해 초 시집까지 내신 선생님답게 산책 전 미리부터 감수성을 끌어올린다.
어제는 단풍들을 보며 새로 시를 한 편 썼다는 선생님.
제목은 '가을의 이끼'.
이끼처럼 여기저기 타고 피는 단풍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산책로로 올라가는 길 '가을의 이끼' 시를 낭송해주신다.
단풍 예찬 일색.
'두 팔 벌려 춤춰봐'
마지막 문장이 좋다.
참은 없지만, 날씨도 받쳐주고 단풍도 피었겠다. 본격 가을 소풍에 나선다.
올라서며 왼쪽으로 핀 편백나무와 오른쪽으로 핀 팥배나무를 구경한다.
원래는 아까시나무가 가득한 산이었다.
황폐화된 산림을 녹화하는데 이만한 나무가 없다 하여 1970년대부터 나라에서 많이 심은 나무가 아까시나무다.
은혜가 원수인지, 제 명을 다 한 건지, 이젠 다른 나무의 생장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베어낸 뒤 다른 나무를 심는다.
여기엔 아까시나무가 있던 자리에 편백과 팥배가 들어섰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 살아가는 것도 아까시나무 같다.
소풍길 친구 해주는 선생님이 내게 말을 건넨다.
"김쌤, 자기가 더 잘 알겠지만 요즘 사람들 사는 게 얼마나 힘든가요"
"아아, 네…."
흙길 걷는 소리, 산새들 소리로 대답을 대신한다.
정상이라면 정상이랄 고지에 올라 산 끝부터 빼곡히 자리 잡은 상가들과 주택가들을 본다.
예쁜 단풍, 빼곡한 건물들, 요즘 사람 사는 일, 가을 생각이 한 데 얽혀 한동안 말없이 저 멀리 쳐다본다.
나는 더 걷기로 하고, 같이 온 선생님은 먼저 내려가기로 한다.
복잡한 생각 하러 나온 게 아닌데.
지나쳐 온 길에 못다 한 단풍놀이를 마저 하러 간다.
다시 단풍놀이하러 가는 길. 세상 일도 그럴까 싶다.
원래 이러려고 올라온 길이 아닌데, 원래 이렇게 하려고 한 일이 아닌데.
좋았던 건 다 지나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지나간 일들을 굳이 꺼내며 단풍놀이만큼은 제대로 즐겨 보겠다며 씁쓸한 마음을 부여잡는다.
바닥에 떨어진 단풍잎을 몇 개 줍는다.
허리를 숙이니 오늘 신고 온 스웨이드 로퍼가 눈에 들어온다.
아차. 이미 흙투성이다.
따지고 보면 단풍잎 몇 장보다 스웨이드 로퍼가 훨씬 비싼데, 기회비용으로 치른 흙투성이 로퍼가 우습다.
경제학으로는 풀 수 없는 심리다.
마침 내리막길에 벤치가 있어서 책 사이 단풍도 끼워본다.
산책길 끝에 다다르니 다시 콘크리트 바닥과 주택이 보인다.
그래. 이렇게들 살아가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