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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승일 Oct 28. 2020

단풍, 두 팔 벌려 춤춰봐

안경을 벗다가 마스크가 벗겨졌다.

틈새로 들어오는 시원하고 신선한 공기. 자연스럽게 하늘을 보게 된다.

마침 오르막길에 있었는데, 교정 옆으로 빨갛게 물든 단풍들이 시선을 잡아 끈다.


교정 옆으로 빨갛게 핀 단풍


나뭇가지 위에 핀 단풍잎만 봤지, 나무를 타고 덩굴처럼 피는 단풍은 처음 봤다.

요즘 바쁘다는 핑계로 날씨 좋다는 말만 앵무새처럼 되뇌었었다.

잠시 걸음을 멈추고 하늘도 보고 여기저기 이름 모를 꽃과 나무들도 본다.


제멋대로 물든 나뭇잎들도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바람 잘 통하는 옷을 입고 나선 것 같은 상쾌!

알록달록한 꽃과 나무들이 하루의 시작을 응원하는 것 같다.

괜시리 가르치는 아이들에게 교과서 말고 사는 얘기 한 번, 꿈 얘기 한 번 해본다.


출근길에 본 단풍들이 아른거려 홀린 사람처럼 다시 단풍길 앞에 서본다.

단풍잎 몇 장 주워서 책갈피로도 쓰고, 소소한 선물로도 줘야겠다고 다짐한다.


단풍잎을 주워 책갈피로 써 본 적이 언제인지. 흰 바탕에 주홍빛 단풍이 선명하다.


오전 수업을 마치고 책을 읽고 있는데, 건너편에 앉은 선생님이 같이 뒷산 산책을 가자고 한다.

마침 단풍 얘기를 꺼낼 참인데 선생님이 선수를 친다.


"봉산(뒷산)에 핀 단풍 보셨나요. 이쁘죠."


올해 초 시집까지 내신 선생님답게 산책 전 미리부터 감수성을 끌어올린다.

어제는 단풍들을 보며 새로 시를   썼다는 선생님.

제목은 '가을의 이끼'.


이끼처럼 여기저기 타고 피는 단풍들의 모습을 그렸다고 한다.

산책로로 올라가는 길 '가을의 이끼' 시를 낭송해주신다.

단풍 예찬 일색.


'두 팔 벌려 춤춰봐'

마지막 문장이 좋다.


나보다 한참을 앞서 간 선생님이지만, 글을 주고받을 때만큼은 친구다.


참은 없지만, 날씨도 받쳐주고 단풍도 피었겠다. 본격 가을 소풍에 나선다.

올라서며 왼쪽으로 핀 편백나무와 오른쪽으로 핀 팥배나무를 구경한다.

원래는 아까시나무가 가득한 산이었다.


황폐화된 산림을 녹화하는데 이만한 나무가 없다 하여 1970년대부터 나라에서 많이 심은 나무가 아까시나무다.

은혜가 원수인지, 제 명을 다 한 건지, 이젠 다른 나무의 생장을 방해한다는 이유로 베어낸 뒤 다른 나무를 심는다.

여기엔 아까시나무가 있던 자리에 편백과 팥배가 들어섰다.

그러고 보면 사람들 살아가는 것도 아까시나무 같다.



소풍길 친구 해주는 선생님이 내게 말을 건넨다.


"김쌤, 자기가 더 잘 알겠지만 요즘 사람들 사는 게 얼마나 힘든가요"


"아아, 네…."

흙길 걷는 소리, 산새들 소리로 대답을 대신한다.


정상이라면 정상이랄 고지에 올라 산 끝부터 빼곡히 자리 잡은 상가들과 주택가들을 본다.

예쁜 단풍, 빼곡한 건물들, 요즘 사람 사는 일, 가을 생각이 한 데 얽혀 한동안 말없이 저 멀리 쳐다본다.


산 끝부터는 건물이 가득하다.


나는 더 걷기로 하고, 같이 온 선생님은 먼저 내려가기로 한다.

복잡한 생각 하러 나온 게 아닌데.

지나쳐 온 길에 못다 한 단풍놀이를 마저 하러 간다.


다시 단풍놀이하러 가는 길. 세상 일도 그럴까 싶다.

원래 이러려고 올라온 길이 아닌데, 원래 이렇게 하려고 한 일이 아닌데.

좋았던 건 다 지나치려고 한 것도 아닌데.

지나간 일들을 굳이 꺼내며 단풍놀이만큼은 제대로 즐겨 보겠다며 씁쓸한 마음을 부여잡는다.


유독 빨갛게 잘 물든 단풍나무
단풍은 빛 받는 쪽부터 물든다.


바닥에 떨어진 단풍잎을 몇 개 줍는다.

허리를 숙이니 오늘 신고 온 스웨이드 로퍼가 눈에 들어온다.

아차. 이미 흙투성이다.


따지고 보면 단풍잎 몇 장보다 스웨이드 로퍼가 훨씬 비싼데, 기회비용으로 치른 흙투성이 로퍼가 우습다.

경제학으로는 풀 수 없는 심리다.


마침 내리막길에 벤치가 있어서 책 사이 단풍도 끼워본다.



산책길 끝에 다다르니 다시 콘크리트 바닥과 주택이 보인다.


그래. 이렇게들 살아가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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