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을 맞아,
아니, 설이나 돼서야 할머니네에 갔다.
'할머니네'라는 말은 내게 늘 씁쓸하다.
어릴 때부터 할머니네가 있던 게 아니라, 내가 다 커서 할머니네가 생겼기 때문이다.
할머니는 요리를 못하셨다.
합기도를 마치고 집에 오면 늘 3분 카레,
어쩔 때는 커피가 반찬이기도 했다.
그래도 난 할머니네가 생긴다고 했을 때 가슴이 쓰렸다.
사실 난 당시에도, 그리고 지금도, 어린 시절을 두고 슬픈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
우리 동네 애들도 다 그렇게 살았다.
옆에서 퍼 나르는 승냥이 떼들만 부풀릴 뿐이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굉장히 부유했다고 한다.
할아버지가 당시 외항선을 몰아 큰돈을 버셨기 때문이다.
왕년의 사진을 보면 쭉 빼입은 정장에, 목에 건 사진기, 선글라스까지.
SNS에서 유행하는 '할아버지 자랑 경연대회'에서도 둘째가라면 서러울 정도다.
해군으로 수십 년을 근무하고, 외항선을 몰 때까지, 물론 그 이후에도 늘 할아버지는 건강하셨다.
멀쩡한 세로가 가로가 되는 시간, 그리고 산소가 호스를 타게 되는 시간 동안 젊음이 늙음으로, 생명이 죽음으로 가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할아버지의 병상을 뒤로하고 집에 갈 때 느끼는 감정이,
할머니네 인사를 드리고 집에 돌아오는 느낌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할머니네가 씁쓸한 가장 큰 이유다.
할머니의 책상에서 화투패를 본 건 꽤 오래전이다.
언젠가 '치매 안심 홈스쿨링'같은 이름으로 어르신 사이에서 화투패 맞추는 게 유행한 적이 있다.
우리가 매일 비타민 통을 곁에 두고 사는 것과 비슷한 이치일 것이다.
화투가 치매의 치료 역할을 했으면 좋으련만,
할머니는 늘 오늘이 며칠인지 묻는다.
옆에서 화투패를 늘어놓다 보면,
나도 헷갈리는 화투 그림 짝을 할머니는 척척 맞춘다.
혹시라도 그림 짝을 잘못 놓으면, 금세 할머니는 맞는 자리에 갖다 놓는다.
화투패가 놓인 책상이,
화투패만큼은 잘 기억하는 할머니의 실력이 씁쓸하다.
돌아오는 길,
엄마가 한 마디 한다.
"아들, 나는 나중에 할머니 되면 오늘처럼 떡갈비 해줘야 해"
"아니다, 언양 불고기, 언양 불고기가 더 좋아"
"꼭 기억하고 있어야 해"
화투패 말고, 언양불고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