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선란의 <천 개의 파랑>
“바람은 늘 시원한가요?”
소프트웨어 칩이 잘못 삽입된 휴머노이드는 몇 년을 살아도 늘 새로운 질문을 한다.
“저는 기계니까요”
언젠가 국립과천과학관에 갔다가 길을 잃었다. 걷다 보니 경마장으로 통하는 길목을 걷게 됐다. 그때 속도에 대한 이미지를 떠올렸다. 그게 이 소설의 출발이란다.
길을 잃어본 지 오래됐다. 손바닥 안에 모든 세상이 있으니 알고 싶지 않은 것도 모두 다 알게 되는 세상이다.
휴머노이드 로봇의 꿈이라는 상투적인 신파극에 코 끝이 쨍한 건 아직 내 맘에도 콜리 같은 순수함이 있어서라고 믿고 싶다. 로봇공학자 한재권 교수가 로봇을 만들게 된 계기는 뇌성마비 동생을 위한 아톰을 선물해주고 싶어서란다. 콜리는 어떤 면에선 아톰 같다.
우연히 본 강연에서 휠체어를 탄 아저씨가 AI를 통해 딸의 손을 빌리지 않고 장을 볼 수 있어서 좋다고 했다. 그때 로봇이 인간의 친구가 될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 자동차도 처음 만들어졌을 땐 세상을 멸망시킬 거라는 조간 뉴스 헤드라인이 나갔다지.
“우리는 모두 천천히 달리는 연습을 해야 한다”. 이 시대 조급과 과잉을 진단하고 나온 구호는 슬로우 라이프다. 웃기게도 슬로우 라이프 또한 급물살을 타고 사라졌지만. ‘천천히’라는 말뜻을 생각하다 보면 내 주변 챙기고 싶은 사람들이 생각난다. 일을 느리게 하는 게 아니라, 반찬을 담그고, 선물을 찾아보고, 고장 난 걸 고치는 게 슬로우 라이프일까.
자기 나름대로 순수를 다 드러내고 살아가는 등장인물들이 정겹다. 만화라면 만화 같은 엉뚱에, 고집이 재미에 한몫한다. 보경의 가족, 연재와 지수, 콜리와 투데이, 그리고 연재와 콜리. 각각의 선명한 관계를 관전하며 내 생각도 많이 했다. 아 참, 편의점 점장님의 얘기도 있었으면 어땠을까.
소비와 속도에 미친 세상을 살며 나도 적응해간다. 반찬보단 사이드 메뉴, 고치기보다 새 걸 산다. 돈이 없어서 더하고 싶어도 못하는 게 한이라면 한이다. 예전엔 패스트푸드와 조급증을 엮는 게 어이가 없었는데, 이젠 그런 것도 같다. ‘바뀐다고 뭐가 달라질까’ 푸념 섞인 질문의 해답이 이 책에서 얼핏 얼핏 보인다.
완벽하지 않은 로봇, 아픈 경주마, 재능은 있지만 성적은 좋지 못한 학생, 지난날에 멈춰있는 엄마. 다시 읽어보면 모두 내 옆 사람들이다. 좀 더 왁자지껄했으면 싶다. 그래야 파랗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것도 내 조급일까. 나도 하늘처럼 파랗고 싶다.
ⓒ 커버, 월간조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