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
굳이 OECD를 들먹이지 않아도 체감되는 삶의 의지 상실은 도처에 많다.
어젠 원하던 회사에 입사해 독일 출장 중인 친구에게 전화가, 오늘은 사랑하던 연인에게 이별 통보를 받은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그렇게 죽고 싶다면 왜 죽지 않냐고 따져 묻던 친구 말이 서럽다던 G의 연락엔 아직 답장하지 못했다.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Man's search for meaning)>를 읽던 중이었다.
"이 수용소에서 저 수용소로 몇 년 동안 끌려다니다 보면 결국 치열한 생존 경쟁에서 양심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사람들만 살아남게 마련이다. 그들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들이었다. 자기 목숨을 구하려고 잔혹한 폭력을 일삼고 도둑질을 하는 건 물론, 심지어 친구까지 팔아넘겼다. 운이 아주 좋아서였든 아니면 기적이었든 살아 돌아온 우리들은 알고 있다. 우리 중에서 정말로 괜찮은 사람들은 살아 돌아오지 못했다는 것을……." (p. 26)
"아우슈비츠야, 저기 팻말이 있어. 그 순간 모든 사람들의 심장이 멈췄다. 아우슈비츠! 가스실, 화장터, 대학살. … 새벽이 되자 거대한 수용소의 윤곽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길게 뻗어 있는 몇 겹의 철조망 담장, 감시탑, 탐조등 그리고 희뿌연 새벽빛 속에 미지의 목적지를 향해 뻗어 있는 황량한 길을 따라 질질 끌려가고 있는 초라하고 누추한 사람들의 행렬, 가끔 고함과 호루라기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지 못했다. 나는 사람들이 대롱대롱 매달려 있는 교수대를 상상해 보았다. 소름이 끼쳤다. 하지만 사실 이것만 해도 괜찮은 편이었다. 왜냐하면 그 후로 점점 더 끔찍하고 엄청난 공포와 만나야 했기 때문이다." (p. 31)
"마침내 내 차례가 됐다. 누군가가 내게 귓속말로 오른쪽은 작업 실행이고, 왼쪽은 병자나 일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가는 특별 수용소행이라고 알려 주었다. 나는 일이 돌아가는 대로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내가 통과해야 할 수많은 관문 중에서 첫 번째 관문이었다. … 그날 저녁에야 우리는 손가락의 움직임이 가진 깊은 뜻을 알게 됐다. 그것이 우리가 경험한 최초의 선별, 삶과 죽음을 가르는 첫 번째 판결이었던 것이다. 함께 들어온 사람의 90퍼센트는 죽음을 선고받았다. 판결은 채 몇 시간도 못 돼 집행됐다. 왼쪽으로 간 사람들은 역에서 곧바로 화장터로 직행했다.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들은 바로는 화장터 문에 유럽 여러 나라 말로 '목욕탕'이라고 쓰여 있다고 했다. 화장터로 들어가기 전에는 사람들에게 비누를 한 조각씩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그다음에 일어난 일에 대해 자세히 묘사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p. 35)
1940년 6월, 나치 친위대에 의해 세워진 아우슈비츠 수용소에서는 약 400만 명이 무참히 죽어갔다. 저자 빅터 프랭클 역시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수감되었었고 감히 말할 엄두조차 나지 않는 체험 이후 인간 삶의 의지에 대해 담담히, 아니 사실은 정말 처절하게 얘기하고 있다. 먼저 말해 둘 것은, 수용소에서의 사람들도 의지를 가지고 살아갔는데 편하게 살고 있는 우리는 더 힘을 내자, 식의 내용은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나를 가장 힘들게 했던 J가 이 책을 추천해 줬고, 나는 이 책을 읽고 정말 다시 삶의 의지를 찾고 있었다. 웃긴 일이었다. 하지만 곧 J를 떠나, 아니 사실은 표면적인 이유들을 떠나 내 삶의 의지는 어떻게 찾을 수 있는지, 찾을 수 있는 것인지 질문하게 했다. 그리고 곧 그 답도 책에서 찾을 수 있었다.
"수용소에 있던 사람 중에서 잠깐이라도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희망을 가질 수 없는 상황, 시시각각 다가오는 죽음의 공포, 다른 사람의 죽음을 보고 나에게도 죽음이 임박했다고 생각하면서 겪은 고통이 자살을 생각하게 했다. 나중에 얘기하겠지만, 나는 개인적인 신념을 가지고 수용소에 도착한 날 절대 '철조망에 몸을 던지는' 짓은 하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철조망에 몸을 던진다는 말은 고압 전류가 흐르는 철조망에 몸을 댄다는 뜻으로, 당시 수용소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행해지던 자살 방법을 이야기하는 관용어구였다. 이런 결심을 하는 것은 우리에게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수용소에서 자살은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다. … 그리고 며칠이 지나면 가스실조차 더 이상 두렵지 않게 된다. 오히려 가스실이 있다는 사실이 사람들로 하여금 자살을 보류하게 한다." (p.44)
"레싱이 이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 세상에는 사람의 이성을 잃게 만드는 일이 있는가 하면 더 이상 잃을 이성이 없게 만드는 일도 있다." 비정상적인 상황에서 비정상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너무 정상적인 것들이다. 심지어 나와 같은 정신과 의사들도 비정상적인 상황, 예를 들자면 정신 병원에 수용된 상태라거나 평소보다 비교적 정상적이지 않은 상황에 처해 있을 때에는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이런 반응들은 며칠이 지나면서 바뀌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충격을 받는 첫 번째 단계에서 두 번째 단계로 이동하는 것이다. 그 단계는 상대적인 무감각 단계로, 정신적으로 죽은 것과 다름없는 상태를 말한다." (p. 47)
빅터 프랭클은 다시 고백한다. 충격에 이어 무감각이 찾아온다고. 곧 동료의 죽음에 무감각해지고, 아니 그건 신경도 쓰지 않고 이젠 동료가 아닌 시신의 소유물로 나를 구원하려고 한다고. 그리고 곧 나에 의해 내가 가진 것들이 죽을 때까지 먹어치워 진다고. 그리고 끝없는 기대의 좌절….
"나는 발진 티푸스 환자들을 돌보려고 한 막사에서 얼마 동안 보낸 적이 있었다. 환자들은 고열에 시달렸으며, 종종 혼수상태에 빠졌다. 그들 중 상당수는 산송장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 사람이 숨을 거두었다. 하지만 나는 아무 감정 없이 그 광경을 바라보았다. 죽음은 그 후로도 계속 이어졌는데, 그때마다 매번 그랬다. 한 사람이 숨을 거두자 나머지 사람들이 아직 체온이 남아 있는 시신 곁으로 다가갔다. 그중 한 사람이 죽은 사람이 먹다 남긴 지저분하기 짝이 없는 감자를 낚아채 갔다. 그다음 사람은 시신이 신고 있는 나무 신발이 자기 것보다 좋다고 생각했는지 신발을 바꾸어 갔다. 세 번째 사람도 앞사람이 했던 것과 똑같이 죽은 사람의 외투를 가지고 갔다. 그런가 하면 또 다른 사람은 진짜 구두끈을 갖게 됐다고 좋아했다." (p. 49)
"마지막 남아 있던 피하 지방층이 사라지고, 몸이 해골에 가죽과 넝마를 씌워 놓은 것같이 됐을 때 우리는 우리 몸이 자기 자신을 먹어 치우기 시작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내장 기관이 자체의 단백질을 소화시켰고, 몸에서 근육이 사라졌다. 그러자 저항력이 없어졌다. 같은 막사에 있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죽어 나갔다. 우리는 모두 다음에는 누가 죽을 것인지, 자기 자신은 언제 죽을 것인지 아주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 매일 저녁 몸에 있는 이를 잡으면서 우리는 자기 알몸을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모두 같은 생각을 했다. 여기 있는 이 몸뚱이, 이제 정말로 송장이 됐구나, 나는 무엇일까? 나는 인간 살덩이를 모아 놓은 거대한 무리의 한 부분에 지나지 않는다. 철조망 너머 사람들로 바글거리는 막사에 갇혀 있는 거대한 무리의 한 부분, 그 구성원의 일부가 죽어서 몸뚱이가 썩기 시작하는 바로 그 거대한 무리의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p. 61)
"그렇게 수용소에서의 마지막 날은 자유에 대한 기대 속에 지나갔다. 하지만 우리가 너무 일찍 샴페인을 터트린 것일까. 국제적십자사 대표는 협정이 조인됐으며, 수용소를 비우지 않아도 된다고 우리에게 확언했다. 그러나 그날 밤 나치 대원들이 트럭을 타고 와서 수용소를 비우라는 명령을 하달했다. … 우리는 나치 대원들을 거의 알아볼 수 없었다. 너무나 친절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망설이지 말고 트럭에 타라고 우리를 설득하면서, 이런 행운을 얻게 된 것에 감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 그로부터 여러 주가 지난 후, 우리는 이 마지막 순간에도 운명의 신이 우리를 우롱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 우리 수용소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작은 수용소에서 찍은 사진들을 보았다. 그날 밤 자유를 향해 간다고 믿었던 친구들은 트럭에 실려 그 수용소로 이송됐다. 그리고 그곳에서 막사 안에 갇힌 채 불에 타 죽었다. 사진으로도 군데군데 불에 탄 동료들의 시신을 알아볼 수 있었다." (pp.101-103)
이렇게 희망을 도저히 찾기 힘든 수용소에서 그들을 버틸 수 있게 한 건, 아니 조금이라도 삶에든 동료에든 의지할 수 있게 한 건, 이런 내적 고백이었다.
"만약 아내들이 우리가 지금 이러고 있는 꼴을 본다면 어떨까요? 제발이지 아내들이 수용소에 잘 있으면서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일을 몰랐으면 좋겠소. 그 말을 듣자 아내 생각이 났다. 빙판에 미끄러져 넘어지고, 수없이 서로를 부축하고, 한 사람이 또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면서 몇 마일을 비틀거리며 걷는 동안 우리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는 알고 있었다. 모두가 지금 아내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때때로 나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별들이 하나둘씩 빛을 잃어 가고, 아침을 알리는 연분홍빛이 짙은 먹구름 뒤에서 서서히 퍼져 가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은 온통 아내 모습뿐이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아주 정확하게 머릿속으로 그렸다. 그녀가 대답하는 소리를 들었고, 그녀가 웃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진솔하면서도 용기를 주는 듯한 시선을 느꼈다. 실제든 아니든 그때 그녀의 모습은 이제 막 떠오르기 시작한 태양보다도 더 밝게 빛났다." (p. 69)
그리고 수용소 속에서 곧 결정적인 삶의 의지를 다시 발견한다.
"강제 수용소에 있었던 우리들은 막사를 지나가면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마지막 남은 빵을 나누어 주었던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고 있다. 물론 그런 사람이 아주 극소수였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만으로도 다음과 같은 진리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기에 충분하다. 그 진리란 인간에게 모든 것을 빼앗아 갈 수 있어도 단 한 가지, 마지막 남은 인간의 자유, 주어진 환경에서 자신의 태도를 결정하고 자기 자신의 길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만은 빼앗아 갈 수 없다는 것이다.
수용소에서는 항상 선택해야 했다. 매일같이, 매시간 결정을 내려야 할 순간이 찾아왔다. … 수면 부족과 식량 부족, 다양한 정신적 스트레스를 받는 환경이 수감자를 어떤 방식으로 행동하도록 유도할 가능성이 있다. 그럼에도 결국 최종적으로 분석해 보면 수감자가 어떤 종류의 사람이 되는가 하는 것은 개인의 내적인 선택의 결과이지 수용소라는 환경의 영향이 아니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난다. 근본적으로는 어떤 사람이라도, 심지어는 그렇게 척박한 환경에 있는 사람도 자기 자신이 정신적으로나 영적으로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를 선택할 수 있다는 말이다. 강제 수용소에서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킬 수 있다.
도스토옙스키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내가 세상에서 한 가지 두려워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고통이 가치 없는 게 되는 것이다." 수용소에는 남을 위해 희생한 사람들이 있었는데, 그들과 친해진 후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이 말을 자주 머릿속에 떠올렸다. 수용소에서 그들이 했던 행동, 그들이 겪었던 시련과 죽음은 하나의 사실, 즉 마지막 남은 내면의 자유를 결코 빼앗을 수 없다는 사실을 증언해 준다. 그들의 시련은 가치 있는 것이었고, 그들이 고통을 참고 견뎌낸 것은 순수한 내적 성취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삶을 의미 있고 목적 있는 것으로 만드는 것. 이것이 바로 빼앗기지 않는 영혼의 자유이다." (pp. 108-109)
"우리는 앞에서 수감자의 내면적 자아에 대한 최종 책임은 심리적, 육체적 요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수감자의 자유의사에 따른 결정에 있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수감자들을 심리학적으로 관찰해 보면 내면세계가 간직하고 있는 도덕적, 정신적 자아가 무너지도록 내버려 둔 사람이 결국 수용소 안 타락한 권력의 희생자가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이런 질문이 제기된다. 무엇이 '내적 소유'를 이룰 수 있으며 또 이루어야만 하는 것일까?" (p. 114)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앞에서 우리는 이와는 다른 의미에서 수감자들이 공포로 가득 찬 현재를 덜 사실적인 것으로 만들고자 과거를 회상하려는 경향이 있다고 얘기했다. 그러나 실제 존재하는 현실에서 현재를 박탈하는 행위에는 어떤 일정한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 사실 수용소에서도 긍정적인 무엇인가를 얻을 수 있는 기회가 분명히 있다. 하지만 대부분은 그것이 기회인 줄 모르고 그냥 지나쳐 버린다. 자신의 '일시적인 삶'을 비현실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것이 삶의 의지를 잃게 하는 중요한 요인이 된다. 그 앞에 닥치는 모든 일들이 무의미한 것으로 여겨진다." (p. 117)
곧 빅터 프랭클은 과거와 현재에서 나아가, 아니 현재를 극복할 수 있는 단 하나의 방법을 말한다.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다.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 병리적 상처를 정신 요법이나 정신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 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 주어야 한다. … 이것이 바로 인간의 특성으로, 이렇게 사람은 미래에 대한 기대가 있어야만 세상을 살아갈 수 있다. 기대를 갖기 위해 때때로 자기 마음을 밀어붙여야 할 때가 있음에도, 인간 존재가 가장 어려운 순간에 있을 때 그를 구원해 주는 것이 바로 미래에 대한 기대이다." (p. 118)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 우리는 모두 이 순간을 두려워했다. 대체로 이런 현상은 아침에 수감자가 옷 입고 세수하는 것을 거부하거나 아니면 연병장으로 나가는 것을 거부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 그 밖에 도움 되는 그 어떤 것도 거부한다. 그냥 포기하는 것이다. 자기가 싼 배설물 위에 그냥 그렇게 누워 있으려고만 한다. 세상 어떤 것으로부터도 더 이상 간섭받지 않고." (p. 120)
그러나 계속 비교하고 있는 건 나였다.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편하면 편한 대로. 이리저리 피해 가며 내 변명이 놓이기 좋은 곳에 숨어 앉길 반복했다. 심지어 이 책을 읽으면서도.
"나는 내 인생에서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어요, 이런 사람에게 어떤 대답을 해 주어야 할까? 가장 필요한 것은 삶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더 나아가 좌절에 빠져 있는 사람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했다.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에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에게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 했다. 인생이란 궁극적으로 이런 질문에 대한 올바른 해답을 찾고, 개개인 앞에 놓인 과제를 수행해 나가기 위한 책임을 떠맡는 것을 의미한다." (pp. 123-124)
그리고 곧 허무와 비관이 어디서 왔는지 생각했다. 내가 마주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상황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었다. 사실 자기 자신도 아닌 자기 자신 속 일부였다. 아니야, 그냥 희망만 잃지 않으면 됐다.
"희망을 잃어서는 안 되고, 우리들의 가망 없는 싸움이 삶의 존엄성과 의미를 손상시키지 않는다는 확신 속에서 용기를 가져야 한다고 말했다." (p. 132)
"이제 강제 수용소에서의 정신 의학, 그 마지막 단계에 이르게 됐다. 풀려난 사람들의 심리다. … 수용소 정문으로 걸어갔다. 조금씩 사방을 둘러보고, 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서로를 힐끗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다음 과감하게 수용소 밖으로 몇 발자국 걸음을 옮겨 보았다. 우리에게 고함을 치며 명령하는 사람이 없었다. 주먹질이나 발길질을 피하려고 자맥질하는 오리처럼 몸을 움츠릴 필요도 없었다. 세상에! … 자유. 우리는 스스로 몇 번이나 이 단어를 되뇌었다. 하지만 아무 느낌이 없었다. … 드디어 꽃이 만발한 초원에 이르렀다. 꽃이 만발해 있다는 것을 눈으로 보고 알았지만, 거기에서 아무런 감흥도 느낄 수 없었다. … 말해 보게. 자네 오늘 기뻤나? 우리 모두 똑같이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몰랐던 그는 부끄러운 듯이 대답했다. 솔직하게 얘기하자면 아니야. 우리는 글자 그대로 기쁨을 느끼는 능력을 상실하고 말았던 것이다. 앞으로 천천히 그것을 다시 배워야만 했다." (p. 138)
"자유를 찾은 지 며칠이 지난 어느 날, 나는 수용소 근처에 있는 시장으로 가려고 꽃이 만발한 들판을 지나 시골길을 걸었다. 종달새가 하늘을 날아올랐고, 새들의 노랫소리가 들렸다. 주변 몇 마일 안에 사람 하나 보이지 않았다. 드넓은 대지와 하늘, 종달새의 환호 그리고 자유로운 공간만이 그곳에 있었다. … 그때 얼마나 오랫동안 무릎을 꿇고 앉아서 이 말을 되풀이했는지 더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었다. 바로 그날, 바로 그 순간부터 새 삶이 시작됐다는 것을. 나는 인간이 되고자 한 거름 한 걸음 앞으로 걸어 나갔다." (p. 140)
"인간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긴장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가치 있는 목표, 자유 의지로 선택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어떻게 해서든지 긴장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성취해야 할 삶의 잠재적인 의미를 밖으로 불러내는 것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항상성이 아니라 정신적인 역동성이다. 한쪽 극에는 실현돼야 할 의미가, 다른 극에는 의미를 실현시킬 인간이 있는 자기장 안의 실존적 역동성이다." (pp. 158-159)
긴장에서의 해방이 꼭 자유를 담보하진 않는다. 육체적 자유가 정신적 자유를 보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힘들 때도 있지만, 사실 힘들 때가 더 많지만 그런 긴장 속에 자기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계속 노력할 때 인간은 더 자유로울 수 있다.
"그럼 이제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었을 때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는지 얘기해 보자. … 이런 의문에 포괄적인 질문을 던지는 것은 체스 챔피언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 가장 절묘한 수는 무엇입니까? 지금 벌어지고 있는 게임의 판세와 상대편 선수의 개인적인 성향을 고려하지 않은 가장 절묘한 수란 없다. 인간 실존도 마찬가지이다. … 삶에서 마주치는 각각의 상황이 한 인간에게는 도전이며, 그것이 그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제시한다. 때문에 실제로는 삶의 의미를 묻는 질문이 바뀔 수도 있다. 궁극적으로 인간은 자기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를 물어서는 안 된다. 그보다는 이런 질문을 던지고 있는 사람이 바로 '자기'라는 것을 인식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 인간은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으며, 그 자신의 삶에 '책임을 짐으로써'만 삶의 질문에 대답할 수 있다는 말이다." (pp. 164-156)
빅터 프랭클은 말한다. 삶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물을 때, 사실 삶의 의미는 물어볼 수 없는 것이라고. 삶의 의미는 대답해 볼 수만 있는 것이라고. 삶이 이미 우리에게 질문하고 있다고. 삶은 우리에게 대답을 구하고 있다고.
그리고 빅터 프랭클은 덧붙인다. 인간은 아우슈비츠 가스실을 만든 존재이자 또한 의연하게 가스실로 들어가면서 입으로 주기도문을 외울 수 있는 존재라고.
G에겐 답하지 않아도 다시 연락이 잘 온다. G는 어떤 대답을 하고 있을까.
ⓒ 커버, 시사IN, '생존자' 레비 당신의 유서, 이현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