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완서의 <한 말씀만 하소서>
알게 모르게 얼마나 많이 신을 죽이고 죽였었던가.
작게는 화장실 급할 때부터, 크게는 가족의 죽음까지.
절망하며 신을 맘속에서 지우길 반복했지만, 웃기게도 짐승 같은 본능적 회복의 시작엔 늘 신께든 주변에게든 의지처를 찾기 마련이다.
엄마 따라 영락교회엘 몇 번 가며, 시끄러운 회중 속에서 가끔 뜨거운 눈물을 흘리곤 하던 그를 이해할 수 없었다. 끝나고 먹었던 종이컵 번데기의 짭짤한 냄새. 그게 그 시절 기억하고 싶은 전부였다.
그러나 10년이 흘러 회중 속에 고요히 외치고 있던 게 나였다. 다른 사람의 슬픔까지 내 양념으로 가져와 밑도 끝도 없이 쏟아내던 그 시절. 이제 보면 그건 신앙심이라기보단 절박함, 아니 허락받은 절규에 가까웠다.
박완서 작가의 아들은 교통사고로 스물다섯 꽃다운 나이에 요절했다. 그 참척의 슬픔으로, 아니 절규 대신 썼다는 일기를 묶어 낸 게 바로 <한 말씀만 하소서>다.
아버지의 병환 중 위로의 말을 구하는 어느 누리꾼에게 이 책을 추천해 주는 글을 읽고, 외상 없는 내 상처에 뜬소문이라도 믿어볼까 하는 심정으로 덩달아 읽기 시작했다.
영원한 현역 박완서 작가에게서 평소엔 볼 수 없는 절절하다 못해 참담한 마음, 욕지기에 가까운 통곡을 보고 있노라면 차마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다.
타인의 슬픔에 공감해서가 아닌, 이 빌어먹을 세상에 대한 절규가 걷잡을 수 없기 때문이다.
기대하는 마음조차 미안했지만 이내 세상과의 화해, 그리고 사랑으로 맺는 박완서 작가를 보며 삶 속 빛나는 희망을 결심할 수 있게 된다.
"눈을 뜨니 낯선 방이었다. 옆에서 손자가 곤히 자고 있었다. 꿈이었으면 하는 몽롱한 착각을 즐길 새도 없이 아들이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무서운 괴물처럼 가차 없이 육박해 왔다. 집에서 같으면 설마 꿈이겠지 하고 현실감을 피할 수 있는 시간이 꽤 길었으련만. 아쉬운 건 그뿐이 아니었다. 아들이 이 세상에 살아있지 않다는 걸 인정하게 되면 그다음은 가슴을 쥐어뜯으며 미친 듯이 몸을 솟구치면서 울부짖을 차례였다." (p. 12)
"나는 아들을 잃었다. 그 애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 사실을 알아듣는 걸 견딜 수가 없다. 그 애가 이 세상에 존재했었다는 증거는 이제 순전히 살아 있는 자들의 기억밖에 없다. 만약 내 수만수억의 기억의 가닥 중 아들을 기억하는 가닥을 찾아내어 끊어버리는 수술이 가능하다면 이 고통에서 벗어나련만. 그러나 곧 아들의 기억이 지워진 내 존재의 무의미성에 진저리를 친다. 자아란 곧 기억인 것을. 나는 아들을 잃고도 나는 잃고 싶지 않은 내 명료한 의식에 놀란다. 고통을 살아야 할 까닭으로 삼아서라도 질기게 살아가게 될 내 앞으로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 아들이 내 속을 썩이거나 실망시킨 일을 생각해 내려고 애쓴다. 물에 빠져 검부락지라도 잡으려는 노력처럼 처참하게 허위적댄다." (p. 26)
"아들을 잃은 것과 동시에 내 교만도 무너졌다. 재기할 수 없을 만큼 확실하게. 그러나 교만이 꺾인 자리는 겸손이 아니라 황폐였다. 내 죄목이 뭔지 알아냈다고 생각하자 조금 가라앉은 듯하던 마음이 다시 끓어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교만의 대가로 이렇듯 비참해지고 고통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치자. 그럼 내 아들은 뭔가. 창창한 나이에 죽임을 당하는 건 가장 잔인한 최악의 벌이거늘 그 애가 무슨 죄가 있다고 그런 벌을 받는단 말인가. 이 에미에게 죽음보다 무서운 벌을 주는 데 이용하려고 그 아이를 그토록 준수하고 사랑 같은 아이로 점지하셨더란 말인가. 하느님이란 그럴 수도 있는 분인가. … 차라리 없는 게 낫다. 아니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시금 맹렬한 포악이 치밀었다." (p.36)
"아침엔 눌은밥을 폭 끓인 걸 한 공기나 먹었다. 균열이 생긴 것처럼 메마른 혀와 식도에 상쾌한 통증을 느꼈다. 구수한 냄새도 좋았다. 딸이 눈을 빛내면서 좋아했다. 이렇게 해서 차츰 먹고살게 되려나 보다, 이런 생각이 들자마자 이내 그럴 수 없다는 강한 반발이 치밀었다. 자식을 앞세우고도 살겠다고 꾸역꾸역 음식을 처넣는 에미를 생각하니 징그러워서 토할 것 같았다. 격렬한 토악질이 치밀어 아침에 먹은 걸 깨끗이 토해냈다." (p. 42)
처절한 문장들. 모두 진실이겠지, 그래서 무섭고도 끔찍하다. 아들이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 앞에 내뱉는 절망과 저주, 포악. 문득 박완서 작가의 등단 인터뷰가 생각난다. 당신은 사실을 써내려 가는 것보다 거짓을 보태는 게 더 재미있다며. 그래서 논픽션을 쓰다가 소설로 전향했다며. 그러나 이 글은 꾸밈이나 거짓 없는 명백한 진실이었다.
"아들이 인턴 과정을 끝마치고 전문의는 무슨 과를 택할까 의논해 왔을 때 생각이 났다. 그 애는 나만 반대하지 않는다면 마취과를 하고 싶다고 했다. 뜻밖이었다. … 내 무지의 탓도 있었지만 마취과는 어째 내 허영심에 흡족지가 못했다. 나는 왜 하필 마취과냐고 물었다. … "그런 식으로 말해서 중요하지 않은 과가 어디 있겠니? 이왕 임상을 하려면 남 보기에 좀 더 그럴듯한 과를 했으면 싶구나." 나는 내 허영심을 숨기지 않고 실토했다. 그때 아들의 대답은 이러했다. "어머니, 마취과 의사는 주로 수술장에서 환자의 의식과 감각이 없는 동안 환자의 생명줄을 쥐고 있다가 무사히 수술이 끝나고 의식이 돌아오면 별 볼일이 없어지기 때문에 환자나 환자 가족으로부터 고맙다든가 애썼다는 치하를 받는 일이 거의 없지요. 자기가 애를 태우며 생명줄을 붙들어준 환자가 살아나서 자기를 전혀 기억해주지 않는다는 건 얼마나 쓸쓸한 일이겠어요. 전 그 쓸쓸함에 왠지 마음이 끌려요." 그 아들에 그 에미랄까, 나 또한 아들의 마음이 끌린 쓸쓸함에 무조건 마음이 끌려 그 애가 원하는 것을 쾌히 승낙했다. … 나는 그때 아들에 대해 새롭게 알았다. 품 안의 자식인 줄로만 알았던 아들이, 알아버렸다가 아니라 알아야 할 무진장한 걸 가진 대상으로 우뚝 섰을 때 얼마나 대견했던지, 그리고 그때의 그 앎의 시작에 대한 설렘까지 꼬박이 밝힌 새벽빛 속에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pp. 56-57)
"딸도 에미의 이런 심정을 빤히 아는지라 제 집에 아무도 찾아오지 못하게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눈치였는데 그 친구는 좀 무례하다 싶을 정도로 예고 없이 들이닥쳤다. 나는 딸 또래의 젊은이로부터 듣게 될 어색한 위로 말이 지레 겁이 나 숨고 싶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그러나 그 젊은이는 내 아픈 곳은 한 번도 안 건드리고 자기가 해온 음식의 맛과 영양가에 대해서만 얘기했다. … 거기까지는 듣기가 좋았는데, 그 집안이 그렇게 잘 되는 것은 그 어머니의 독실한 신앙과 끊임없는 기도생활 덕분이라는 것을 자손들이 느끼고 늘 감사하며 산다는 대목에서 나는 그만 마음이 몹시 상하고 말았다. 상한 정도가 아니라 가슴에 못이 되어 박히는 기분이었다."(pp. 60-61)
"나는 그럼 기도가 모자라서 아들을 잃었단 말인가. 꼭 그렇게 들려서 고깝고 야속했다. 세상에 자식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은 에미가 어디 있단 말인가. 가톨릭에 입교한 지가 4년밖에 안 되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기도한 지는 그밖에 안 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그전에 기도가 없었을까. … 다섯 아이를 다 젖 먹여 기를 때, 어린것을 가슴에 안고 내 몸 안에서 가장 좋은 것뿐 아니라, 내 심성 속에서 가장 좋은 것만이 자식에게 아낌없이 주어지길 비는 마음은 거의 접신의 경지였다." (pp. 62-63)
"정신의 고통이 어느 한계까지 차올랐을 때, 기절할 수 있는 장치가 돼 있는 몸을 가진 사람은 축복받은 사람이다. 내 몸과 마음에는 불행히도 그런 장치가 빠져 있었다. 내가 자신을 독종이라고 저주하는 까닭도 바로 거기에 있다. … 연미사도 위로가 되지 못했다. 미사 후 딸이 나를 신부님에게 인사시키려고 했다. 나는 그분이 뭔가 위로의 말을 찾으려고 머뭇대는 걸 보자 얼른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그 자리를 피했다. … 그렇게 수시로 눈물을 짰건만 생전 울어보지 못한 것처럼 정말로 순수하게 혼자가 됐을 때 제일 먼저 하고 싶은 것은 실컷 울어보는 거다." (p. 77)
옅은 희망이라기 보단 관성에 가까운 일상으로의 복귀 시도. 그러나 번번한 실패. 추억도, 위로도, 계시도, 좋은 것들도 모두 깊은 슬픔 앞에선 여러 모습의 참담함을 가중할 뿐.
"아침엔 처음으로 된밥을 달라고 해서 딸 보는 앞에서 여봐란듯이 반 공기 가량 거뜬히 먹어치웠다. … 이제 무엇이든지 먹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나서 오늘 수녀원에 들어가겠노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고 나서 몰래 화장실에서 아침에 먹은 걸 다 토해내고 말았다." (p. 90)
"곧 마리로사 수녀님이 와주었다. 바쁜 틈을 내서 와준 것 같았다. 늘 바쁘고 자기 일로 인하여 충분히 충만된 사람 특유의 가쁜 숨을 쉬고 있었다. 뒷산으로 산책을 가자고 했다. 고마웠지만 이 수녀님이 나에게 계속해서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면 어떠나 걱정이 되기도 했다. 이 안에서만은 완벽하게 혼자이고 싶었다. … 수녀님은 어린애한테 위인전 얘기를 해주듯이 재미있고 신바람 나게 요한 23세 얘기를 다 해주고 나서 비로소 나더러 이곳에 잘 왔다고, 마음 편히 지내길 바란다는 뜻의 인사말을 했다. 연민이 섞이지 않은 담담한 말투여서 고마운 한편 조금은 서러웠다. 그동안 나는 싫어하는 것처럼 굴면서도 실은 얼마나 남이 나를 불쌍히 여기면서 비위 맞추고 위해주는 데 길들여졌던가." (pp. 93-99)
"그래, 나는 주님과 한번 맞붙어보려고 이곳에 이끌렸고, 혼자돼보기를 갈망했던 것이다. 주님, 당신은 과연 계신지, 계시다면 내 아들은 왜 죽어야 했는지, 내가 이렇게까지 고통받아야 하는 건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 말씀만 해보라고 애걸하리라. 애걸해서 안되면 따지고 덤비고 쥐어뜯고 사생결단을 하리라. 나는 방바닥으로 무너져 내렸고 몸부림을 쳤다. 방안을 헤매며 데굴데굴 굴렀다. 나는 마침내 하나의 작은 돌멩이가 되었다." (p. 102)
이끌리듯 가닿은 수녀원, 절대자를 시험하기 위해 갔지만 그럴수록 남는 것은 생생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고통은 치과의사 앞에 가는 것이라고 했던가. 고통이 시작되고, 최고의 고통이 곧 다가올 것이라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고통은 얼얼함만 남기고 끝이 나있다.
"어젯밤엔 여기 온 후 처음으로 깜박 잠을 잘 수가 있었다. … 그동안 아들을 꿈에 보았다. … 그 애를 왜 데려갔는지 한 말씀만 하시라고 처절하게 기도하고 몸부림친 끝에 꾼 꿈이었다. 뭔가 내 인식의 한계를 초월한 신의 계시 같은 게 있어 마땅했다. 꿈에 나는 둘째 딸과 함께 서울역으로 친정 숙모를 배웅 나갔다. 2년 전에 돌아가신 숙모였다. … 그때였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아들이 내 치마꼬리를 선뜻한 느낌으로 스치면서 앞지르는 게 아닌가. 여남은 살 적의 아들이었다. 볼이 붉은 동안에 그때 내가 떠준 곤색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 아들은 쏜살같이 앞의 숙모까지 앞질러 층층다리를 내려가고 있었다. … 아니, 쟤가, 저 녀석이 무슨 짓이야. 나는 애타게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허위적거렸다. 아들은 명량하고 장난스러운 얼굴로 흘금흘금 뒤를 돌아다볼 뿐 달음질을 멈추지 않았다. 층층다리 밑에는 기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아들이 냉큼 기차를 타는 게 보였다. … 불안해서 목메어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허둥지둥 뛰었다. … 드디어 나도 기차 옆까지 갔으나 올라타지는 않고 밖에서 아들을 불러 내리려고만 했다. … 나는 밖에서 어서 내리라고 손짓하면서 그 애를 따라 그 애와 평행선으로 앞으로 앞으로 달렸다. … 그러나 웬걸, 기차는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 게 아니라, 어느 순간 로켓처럼 사라져 버렸다." (pp. 114-116)
"나는 마치 귀중품을 훔쳐간 소매치기를 고발하듯이 열렬하게 악다구니를 치며 수녀님에게 하느님을 고발하고 있었다. … 풀리지 않은 방정식은 불완전한 거고 반드시 해답이 있을 것이다. 방정식을 풀기 위해서라도 내세는 있지 않겠냐는 것이 수녀님 대답의 요지였다. 내가 극도로 감정적일 때 될 수 있는 대로 이성적인 방법으로 신을 제시해 보려는 게 역시 수녀님다웠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것을 믿기 위해서 한번 크게 건너뛰는 일은 내 소관이지 누가 도와줘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pp. 119-120)
"저녁식사는 뜻밖에도 여러 젊은이들과 함께 들 수가 있었다. … 혼자 자던 그 휑한 건물 안에 왁자지껄 인기척이 날 생각을 하니 기뻤고 식탁에 웃음꽃이 만발하니 또한 즐거웠다. … 그중 어린 수녀님이 속세의 친구에게 하는 소리가 문득 내 관심을 끌었다. 수녀원에 들어오기 전 얘기였다. 남동생이 어찌나 고약하게 구는지 집안이 편할 날이 없었다고 한다. 왜 하필 내 동생이 저래야 되나? 비관되고 원망스럽기도 하다가 어느 날 문득 '세상엔 속 썩이는 젊은이가 얼마든지 있다. 내 동생이라고 해서 그래서는 안 되란 법이 어디 있나?', '내가 뭐관대……'라고 생각을 고쳐먹고 그 사실을 받아들이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지고 동생과의 관계도 호전이 되더라고 했다. … 간발의 차이 같지만 실은 사고의 대전환이 아닌가. 나는 신선한 놀라움으로 그 예비 수녀님을 다시 바라보았다. … 내가 만약 '왜 하필 내 아들을 데려갔을까?'라는 집요한 질문과 원한을 '내 아들이라고 해서 데려가지 말란 법이 어디 있나'로 고쳐먹을 수만 있다면, 아아 그럴 수만 있다면. 구원의 실마리가 바로 거기 있을 것 같았다.
어려서 무서운 꿈을 꾸다가 흐느끼며 깨어난 적이 있었다. 꿈이었다는 걸 알고 안심하고 다시 잠들려면 옆에서 어머니가 부드러운 소리로 말씀하셨다. "얘야 돌아눕거라, 그래야 다시 못된 꿈을 안 꾼단다." 돌아누움, 뒤집어 생각하기, 사고의 전환, 바로 그거였어. 앞으로 노력하고 힘써야 할 지표가 생긴 기분이었다. 나는 내 속에 생긴 희미한 희망 같은 것을 보듬어 안고 그들이 헤어지기 전에 먼저 내 방으로 돌아왔다." (pp. 119-127)
"… 옆방 부인과의 겸상이었다. 내가 그 부인에게 결정적인 위안거리가 되었다고 여긴 건 착각이었나? 그 부인은 여전히 수심에 싸인 어두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 단둘이의 식사는 괴로웠다. 부인은 거의 식사를 하지 않았다. 나 같은 사람도 사는데 그 정도의 자식 걱정으로 저 다지도 상심을 하다니. 나는 슬그머니 아니꼬운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봐란듯이 카레라이스를 아귀아귀 먹었다. 나는 왜 이럴까? … 점심에 과식한 게 속에서 보깨기 시작하더니 점점 더 심해졌다. … 내가 통 식사를 못한다고 수녀님마다 걱정을 해주시는데 과식하고 체해서 쩔쩔매는 꼴을 보여줄 순 없었다. 그중에도 그런 체면을 차리려 들었다.
마침내 가슴에 걸린 빗장이 부러지는 것처럼 격렬한 통증이 오면서 점심 먹은 걸 고스란히 토해냈다. … 나는 변기의 가장자리를 양손으로 짚고 무릎 꿇은 자세로 꼼짝도 할 수가 없었고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었다. 얼마 만이었을까, 한 생각이 떠올랐다. 텅 빈 머리에서 갑자기 떠오른 생각이어서인지 그건 내 머리에서 나온 생각이라기보다는 계시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 십자가 밑에서 밤새도록 몸부림치며 구해도 얻어낼 수 없었던 응답이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고 앉았을 때 들려올 게 뭐였을까? 그때 계시처럼 떠오른 나의 죄는 이러했다.
나는 남에게 뭘 준 적이 없었다. 물질도 사랑도. … 극히 일부와 소수의 친구에 국한돼 있었다. … 모르고 잘못한 적은 있을지도 모르지만 의식하고 남에게 악을 행한 적이 없다는 자신감이 내가 신에게도 겁먹지 않고 당당하게 대들 수 있는 유일한 도덕적 근거였다. 주지도 않고 받지도 않은, 타인에 대한 철저한 무관심이야말로 크나큰 죄라는 것을, 그리하여 그 벌로 나누어도 나누어도 다함이 없는 태산 같은 고통을 받았음을, 나는 명료하게 깨달았다. 하필 변기 앞에 무릎 꿇은 자세로, 나는 그 정답에 머리 숙여 승복했다." (pp. 138-142)
"이윽고 기운을 차리고 화장실을 나왔다. 침대에 누우니 극심한 고통에서 벗어난 육신이 그렇게 편안할 수가 없었다. … 세상 모든 즐거움에 뜻이 없다고 여겼는데 거의 행복감에 가까운 기쁨을 느끼고 있었다. 감미로운 잠이 엄습했다." (p. 143)
"좋은 날이다. 며칠 날이 궂은 뒤라 그런지 공기가 닦아놓은 유리처럼 다만 투명하게 반짝거린다. 그러나 투명한 것, 보이지 않는 것의 며칠 사이의 역사는 얼마나 엄청난가. 산의 빛깔이 어제의 빛깔이 아니다. … "어머나!" 소리가 저절로 나왔다. 이파리 하나하나에 광활하고 처절한 노을빛을 구현하고 있었다. 그날 밤 저 빛깔을 짜내느라 그리고 슬피 애곡한 것일까? 가슴이 찡하여 역설적으로 <최후의 발악>이란 별명을 붙여주고 혼자서 쓸쓸하게 웃었다." (pp. 144-145)
"집에서는 자식들이 성화를 해대서, 수녀원에서는 수녀님들이 조심스럽게 걱정을 해 줘서 할 수 없이 먹는 척해왔다고 여기고 있었다. … 지금은 남을 위해 먹어주는 게 아니라, 내가 먹고 싶어서 먹고 있다는 자의식이 나를 한없이 부끄럽고 참담하게 했다. … 육신의 이 뜻하지 않은 반란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비빔밥을 꿀같이 달게 먹고 내 방으로 도망치듯 돌아온 나는 나에게 따지듯이 물었다. '너는 이제 살고 싶으냐'고. '아니야, 절대로 아니야'라고 나는 강하게 부인했다. 그러나 저녁 기도 시간이 가까워지자 나는 다시 배가 고팠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도 하루를 반성하기 위해서도 아닌, 단지 식욕을 채우기 위해 허위허위 성당으로 가는 언덕길을 올라갔다." (pp.150-154)
자식 잃은 슬픔이 가장 슬프다는 글들을 떠올리며, 그때마다 나는 얼마나 무관심해 왔던가.
요약하기도 미안한 문장들을 붙들고 엄마 생각도 했다가, 살고 죽는다는 것에 대해서도 생각했다가.
박완서 작가에게 건넨 수녀의 한 마디가, 절대 바뀌지 않을 것만 같은 생각 속 최초의 균열이었던 것처럼.
나도 책 속 문장들을 헤매며 평소 가졌던 조소와 무관심에 울렁거림을 느낀다.
사실 영어를 공부하지 않아도, 돈 될 만한 부업을 찾지 않아도, 스스로에게 자신이 없어도, 우리는 얼마나 접신의 경지로 매일 바라고 있는가. 매일 기도하고 있는가. 사실 매일 사랑하고 있는가.
ⓒ 커버, 연합뉴스 AP, 故 박완서 작가 안식 기원하는 이해인 수녀, 신영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