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
이른바 '낙태죄'의 개정안 입법 예고를 앞두고 세간이 떠들썩하다.
작년 4월 11일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이 선행되었지만, 임신 중지 근처를 배회하는 죄의 낙인은 좀처럼 가실 기미가 없다.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는 산부인과 의사인 '나'(정지수)와 갑작스럽게 임신한 동생(해수)의 이야기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단편 소설이다. 동생의 결혼과 임신을 둘러싼 인물들의 이야기는 얼핏 뻔한 드라마를 주선할 것 같지만, 곧 복잡하게 엇갈리며 임신 중지에 대한 새로운 화두를 던진다.
"12월 한 달간 해수는 소아청소년과 인턴이었고 아기들의 가느다란 팔에서 채혈을 하랴, 응급실 초진을 보랴 많이 지쳐 있었죠. 그런 와중에 해수가 전날 '언니야! 내 합격해따!!'라는 카톡을 보내왔습니다. 대구 사투리를 고칠 생각이 없는 해수의 말투가 고스란히 담긴 그 메시지는 본인이 지원한 영상의학과에 전공의로 뽑혔다는 뜻이었어요. 혼자서 꺅, 소리를 지른 나는 저녁에 구내식당에서 콜라로라도 축배를 들자고 답장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해수는 해수대로, 나는 나대로 바빠 시간을 맞추지 못하다가 시장 바닥 같던 응급실마저 한산해진 새벽에야 겨우 조우한 것이었지요." (pp. 105~106)
작 중 산부인과 의사로 재직 중인 '나'는 동생 해수의 같은 병원 전공의 합격 소식을 축하하기 위해 구내식당에서 콜라 축배를 나누기로 한다.
그러면서 곧 '나'가 산부인과 전공의가 됐던 당시 진심으로 축하해준 '희진 언니'를 떠올린다.
"해수의 뺨에 캔을 대고 놀랠 생각을 하며 피식피식 웃고 있자니 문득 희진 언니가 생각나더군요. 희진 언니는 내가 인턴이었을 때 산부인과를 택한 나를 진심으로 축하해준 거의 유일한 사람이었습니다. … 언니와의 통화를 떠올리면서 한쪽 입꼬리를 올리고 있는데 진녹색 구형 마티즈 한 대가 주차장으로 요란스레 들어왔습니다. 서둘러 내린 두 사람이 응급실로 달려오는 모습이야 이상하지 않았으나 중년 남성 두 명이 강보에 싼 신생아를 각기 안은 모습을 좀체 보기 드문 일이었지요. 그들을 따라 나도 안으로 들어가니 책임간호사가 목청껏 "무명 아기 1, 무명 아기 2 도착했습니다!"라고 외치는 게 들렸습니다." (p. 106)
희진 언니를 떠올리며 동생 해수와 오붓하게 시간을 보내던 중, 강보에 싸인 신생아들이 들이닥친다.
"나로서는 매일 받는 신생아였음에도 무명 아기들과 아기들을 둘러싼 이들의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벅차오르는 느낌이었습니다. 하지만 고양된 스스로가 이내 의아해졌는데, 그런 풍경 앞에서도 온전히 감정에 머리를 맡기지 못하는 내 심성이 밭은 것 같아 코웃음이 나왔습니다. 연락을 받고 내려온 소아청소년과 후배가 해수의 진찰을 확인하는 사이 의료진들은 제자리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해수만은 아기들에게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멍하니 서 있었죠. 살금살금 해수에게 다가간 나는 뒷덜미에 콜라캔을 슬며시 댔습니다. 깜짝 놀라 돌아보는 해수에게 "축하해"라고 속삭이자 해수가 싱겁게 웃고는 아잇적으로 돌아간 듯 내 품에 안겼어요. 나는 그런 동생을 안고서 부쩍 마른 등을 쓰다듬었지요. 그런데 그 순간 내 뒷목으로 서늘한 기운 스쳐 지나가더군요. 아주 잠시였지만 매우 분명하게 말입니다." (p. 107)
작 중 나는 신생아를 대하는 상반된 태도의 동생을 보며,
산부인과 사회와 일의 문법에 익숙한 자신과 생명에 순수하기만 한 동생의 모습을 바라본다.
"난데없는 정체였지만 조바심이 잃지 않은 까닭은 희진 언니의 제안을 내가 수락했음에도 언젠가부터 그곳에 가는 일이 피곤해진 탓이었죠. 나보다 삼 년 먼저 산부인과 전문의가 된 희진 언니는 지도전문의 자격을 갖추고도 병원 대신 시민단체 상근직을 택한 열정적인 활동가였습니다. 동시에 언니는 젠더 건강 분야에서 손꼽히는 칼럼니스트이기도 했는데 촘촘한 논리 끝에 마음을 울리는 언니의 글은 적잖은 사람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지요. 작년 가을 언니가 오랜만에 연락해온 이유는 낙태죄 헌법소원을 계기로 재생산권 이슈가 뜨거워지자 저명한 진보 시사지에서 언니에게 필진을 모아달라고 요청했기 때문이지요. … 그간 활동에 소극적이었던 나는 쉽게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전화기 너머에서 언니가 "이번엔 달라야 하지 않겠니?"라고 강건한 말투로 묻더군요. 언니의 말은 낙태죄 헌법 소원에 합헌 결정이 내려졌던 수년 전을 떠올리게 했고, 그해 여름밤 언니와 나눈 통화를 복기한 나는 투항이라도 하듯 그러겠노라 답했습니다." (pp.108~109)
평소 따르던 희진 언니의 '낙태죄 헌법불합치'를 위한 모임 요청에 나는 못 이기는 척 응한다.
그러나, 곧 모임의 취지와 나의 의견 사이에 틈이 있음을 알게 된다.
"세련되고 단정한 매무새를 흩뜨린 적이 없던 언니는 새치가 절반인 단발머리를 쓸어 넘기며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내게 "왔어?"라고 심상히 인사를 건넸어요. … 예닐곱 명의 필진이 여느 때처럼 스터디 룸에 모였지요. 그날은 희진 언니의 초고를 읽을 차례였습니다. 언니는 전에 발표한 칼럼에 이어 이번에도 미페프리스톤의 시판 허가를 촉구하는 글을 써왔어요. … 희진 언니는 자궁외 임신 여부만 미리 감별한다면 미페프리스톤과 미소프로스톨의 병합요법이 최선의 임신 중지법임을 다시금 강조했습니다. … 이런 내용과 함께 약물적 임신 중지법이 알려져야 관행적으로 시행되어온 소파술에 따르는 공포 임지를 상쇄할 수 있다는 주장이 담겨 있었습니다. … 그럼에도 나는 언니의 초고에 온전히 동의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직관적으로 받아들이기 편한, 그래서 방어적으로 읽히는 문장들 때문이었죠. 이를테면 언니는 "이렇게 안전한 약물적 임신 중지법은 차기 임신에 영향을 주지 않아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한다"라고 쓰기도 했고, "어떤 여성도 임신 중지를 결코 쉽게 결정하지 않"는다며 "여성 자신의 삶과, 가족과, 무엇보다 미래의 아이들을 위해 고심 끝에" 결정한다고 적기도 했지요. … 나는 이런 수사들이 못내 불편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운동단체 활동가인 은빛 씨가 먼저 손을 들더니 "아무래도 우리가 주로 다루는 사안의 한계이긴 하지만……"이라면서 이 모임에서 다루는 글은 늘 교차성에 대한 고민이 부족한 것 같다고 지적했습니다. 은빛 씨는 자주 그와 같은 지적을 하며 열변을 토했는데 그날도 크게 다르지는 않았어요." (pp. 110~112)
나는 모성적인 수사를 강조하며 호소하듯 나열한 선배의 문장에 반감을 느낀다.
여성의 임신 중지는 더 나은 미래에 대한 보장이자 고심 끝 선택이라는 구습적 구호 아래,
결국 낙태에 대한 동의가 아니라 낙태의 죄를 폐지하는 것에 동의하는 선배의 분위기를 감지한다.
"그러는 동안 나는 어머니가 연달아 전화를 걸어오는 바람에 스터디 룸에서 잠시 나와야 했죠. … 어머니는 떨리는 목소리로 "지수야……" 하고는 말을 잇지 못했어요. 불안해진 내가 무슨 일이냐고 묻자 어머니는 … "내가 남사스러버 못 산다. 우짜면 좋노? 해수 임신했단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에 맥이 풀린 나는 하하하, 하고 큰 소리로 웃어버렸어요. … 어머니의 푸념에 실소를 그치지 못하면서도 해수라면 충분히 그랬을 거라 생각한 것은 … 해수의 성격도 성격이지만 그즈음 친한 친구들이 연이어 결혼하는 통에 해수가 조급해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 모범생의 전형에서 크게 엇나간 적이 없던 동생의 갑작스러운 임신은 그렇잖아도 쉽게 불안에 빠지는 어머니를 자극했습니다." (pp. 113~114)
낙태죄는 위헌이므로 낙태는 합헌이라는 모임에 열중하다가, 어머니의 전화를 받는 나.
미혼인 동생 해수의 갑작스런 임신 소식을 전해 듣고는, 충분히 그럴 수 있다며 웃어넘긴다.
"주차장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블루투스를 연결해 해수에게 전화를 걸었어요. 신호음이 어려 번 울리다 합정역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기다릴 때 헤헤헤, 하고 웃는 소리가 차 안을 메웠습니다. 적이 민망한 듯 장난기 섞인 해수의 웃음소리에 나도 웃음이 터져 우리는 한참을 웃었지요. … "내가 원래 좀 불규칙하다 아이가? 요새 야간근무도 많아서 그거 때문인 줄 알았지." 양성반응을 확인하자마자 민 교수 외래로 달려간 해수는 벌써 임신 9주라는 말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 해수는 돌연 부드러워진 목소리로 남자친구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 나는 이따 집에 도착해 다시 연락하겠다며 전화를 끊었습니다." (pp. 114~115)
임신 9주 차라는 해수의 소식.
나는 해수의 임신 소식에 대견함과 찝찝함을 동시에 느낀다.
"그사이 어머니는 아버지에게 해수의 임신 소식을 전한 모양이었습니다. …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잠자코 듣기만 하다가 어머니의 호흡마저 가빠지는 것 같아 진정하시라고 말했지만 내 말을 못 들었는지, 듣고도 모른 척 한 건지 어머니는 울먹이다시피 소리쳤습니다.
"지수야! 그거 진짜 순간이고, 암것도 아니었다!"
순간 말문이 막힌 나는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는 것을 보았음에도 그 안으로 들어서질 못했습니다. 본인도 내뱉고서야 무슨 말을 했는지 깨달은 듯 머뭇거리던 어머니는 한결 누그러진 목소리로 "지수 니가 더 잘 안 아나? 요즘엔 기술도 발달했을 거 아이가"라고 물었지요" (pp. 115~116)
집으로 가며 다시 온 어머니의 전화,
동생 해수와 나 사이에 두 번의 임신 중지가 있었다는 어머니의 회상을 떠올리며, 나는 어머니의 다급한 목소리에 보수적인 어머니와 천진난만하기만 한 해수의 미래를 동시에 걱정한다.
"그렇게 복도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데 문득, 오래전 내 뒷목을 스쳤던 서늘한 기운이 느껴지더군요. … 그날 이후에도 해수의 집에 간간이 들러 한갓진 시간을 보내곤 했지만 … 끊임없이 엄습해오는 생각을 피하지 못한 채로 그곳에서 며칠을 보낸 후 나는 인정해야만 했습니다.'더 좋은 엄마가 될 준비가 된 다음에'라는 표현이 부른 불쾌감과 별개로, 어머니의 그 말이 줄곧 내게 다른 가능성을 떠올리게 했다는 것을 말입니다. … 나는 알려야 하지 않을까. 희진 언니의 말처럼 우리에게 안전하고 편리한 선택지가 있음을 해수도 알아야 하지 않나."(p. 121)
"우리가 정민 선배의 초고를 점검한 날은 헌재 결정을 석 달여 남긴 일요일이었어요. … 정민 선배는 희진 언니보다 여섯 기수 높은 산부인과 전문의로 … 그날 정민 선배가 가져온 초고는 자신이 임신 중이었을 때 미성년자 산모의 임신 중지 시술을 해야 했던 상황을 고백하는 내용이었습니다. … 쓰면서 마음고생이 심했다며, 좋게 봐주어서 고맙다고 말한 선배는 잠시 안경테를 매만지다 원래 쓴 글에서 지운 내용이 있다고 덧붙였어요. 실제 그 시술을 하고서 제일 힘들었던 기억은 글에서 삭제한 부분인데 아무래도 반대세력에게 역이용될 소지가 있어 지웠다는 것이었죠. … 사실 그날 밤, 시술한 아기의 초음파 이미지가 꿈에 나타났다. … 시술한 아기와 곧 태어날 제 아기의 이미지가 뒤섞여 아른거렸다는 선배는 주방 바닥에 주저앉아 "미안하다. 너무 미안하다"라고 끊임없이 되뇌었다며 가늘어진 목소리로 말을 맺었죠. … 이야기를 듣고 나니 선배가 그 내용을 삭제한 까닭은 이해가 갔습니다. '봐라, 시술한 의사마저 힘들어한다'라는 메시지로 적용될 만했으니까요. … "태아도 아니고 배아일 때니까, 실제 초음파상에서는 그냥 덩어리처럼 보였겠지요. 그런데 뭐랄까 …"(pp. 123~124)
희진 선배의 모임원 중 한 명인 정민 선배는 '낙태는 합법이다'라는 모임의 목적에 도움될 만한 글을 적어왔다가 돌연 고해성사를 한다.
임신 중지 시술을 한 뒤 배아 형태에 불과했던 태아의 모습이 어른거려 힘들었다는 고백 말이다.
"입을 다문 나는 팔짱을 낀 채 등받이에 몸을 기댔습니다. 배아마저 아기의 형상으로 묘사하는 것은 지나치게 관습적인 재현이 아닌지, 그렇게 관습적으로 재현되는 음울함만이 임신 중지와 연결되는 유일한 감정이어야 하는지. … 그런데 그때 은빛 씨가 격앙된 목소리로 "제가 할 말이 있는데요"리며 손을 들었습니다. … 정민 선배의 글과 발언이 모두 불쾌했다고 강한 어조로 말하는 은빛 씨의 말에 나는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었죠. 하지만 은빛 씨의 논지는 내 생각과는 사뭇 달랐습니다. … 우리 필진 중 상당수가 중산층 이상의 고학력자인 까닭에, 특히 이런 에세이 유가 납작한 감수성이 두드러진다고 주장했습니다. … 그렇잖아도 이런 말을 하러 왔다며 공격적으로 발언하는 은빛 씨를 정민 선배는 붉어진 얼굴로 쳐다봤지요. … 분위기가 과열될 조짐을 보이자 희진 언니는 얼른 끼어들었어요." (pp. 124~125)
나는 임신 중지의 이미지를 관습적으로 재현되는 음울함과 비윤리성으로 대변하는 듯한 정민 선배의 말을 불편하게 느낀다.
곧 모임원 중 다른 사람인 은빛 씨는 고학력자들의 동정적 감수성에 반감을 표한다.
분위기가 과열될 조짐을 보이자 희진 선배는 모임을 정리한다.
"공영주차장으로 걸어가는 나를 부른 언니는 담배나 피우자며 주도로 변의 좁은 골목길 안으로 먼저 들어갔어요. … 언니가 "아까는 뭐였어?"라며 심상한 투로 물었습니다. … 나는 그 말에 나름의 용기를 냈고, 언니와 구성원들의 글에 대해 입때껏 느껴온 불편한 점들을 털어놓았습니다. 내가 말하는 동안 "맞아, 맞아"라며 연신 동의를 표하는 그녀에게 나는 "언니도 그렇지 않아요?" 라고 물었습니다. … 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 기혼이라도 당혹감과 우울을 숨기지 못하는 산모들, 반대로 뜻밖의 유산에도 안도감이나 위안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들을 우리는 많이 보아오지 않았느냐고 말입니다." (pp.128~129)
모임을 마치고 같이 내려가던 희진 선배는 아까의 불편한 기색을 눈치챘다는 듯 넌지시 아까 생각을 묻는다.
임신 소식을 전했을 때 기혼이라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거나, 유산이라도 안도감을 감추지 못하는 사례들을 말하며 희진 선배에게 동의를 구한다.
""그런데 지수야." … "옳다고 여기는 거랑 말해져야 하는 게 늘 같을 수는 없더라고." 언니는 그 말을 하고서 담배 필터를 내 쪽으로 향했습니다. 내가 고개를 젓자 다시 자기 입술로 가져간 언니는 그것을 다 태울 때까지 무심한 얼굴로 침묵을 지켰어요. … "알잖아, 이 시기를 잘 헤쳐가려면 우리도 우리의 도덕적 우위를 잃으면 안 된다는 거"" (p.129)
그러나 희진 선배의 온도는 사뭇 달랐다.
본인은 임신 중지의 당위성이나 진지한 논의보다도, 본인 입장의 도덕적 우위를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말 말이다.
같은 주제를 놓고 구호를 외쳐도 누군가는 우위를 위해서, 누군가는 진정 동의를 위해서, 누군가는 절반쯤 믿어서, 누군가는 절반쯤 모르겠어서 어영부영 함께 한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낀다.
"기념사진을 찍기 위해 주례 단상으로 올라가 해수 옆에 섰을 때, 부케를 든 손으로 내 오른팔을 휘감은 동생은 그날과 마찬가지로 굳게 팔짱을 꼈습니다. … 대기 중인 리무진 앞에서 내가 해수를 꼭 안아주자 "언니……"라며 또 눈물을 흘리기에 "대체 오늘 몇 번을 우는 거야" 하고는 동생의 눈가를 닦아 주었습니다. … 해수 부부가 차에 타려는데 어머니가 "우리 아가야한테도 잘 갔다고 오라고 해야지"라고 하시고는 몸을 낮추었습니다. … 킥킥거리던 해수는 제 배를 내 쪽으로 내밀더니 "많이 오글거리나? 언니야도 함 해봐라, 자!"라고 개구지게 말했죠. … 하는 수 없다는 듯, 콧김을 길게 내쉰 나는 머뭇머뭇 무릎을 굽히고는 허벅지 위에 손을 얹었습니다. … 나직하게나마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보내고 나니 갈비뼈 언저리에서 손바닥만 한 무언가가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pp. 132~133)
해수의 결혼식 날.
해수를 꼭 안아주며 보내주려던 차, 어머니는 언제 임신 중지를 얘기했었냐는 듯 해수의 뱃속 아이에게 인사를 건넨다. 나도 망설이다 곧 인사를 건넨다.
"홀린 듯이 키보드 위에 손을 올린 나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 "……임신 중지를 겪은 모든 여성이 동일하게 경험하리라 가정되는 비감은 그들에게 생명을 폐기시켰다는 자기 인식을 갖게 해 스스로를 비윤리적인 존재로 획일화하도록 만든다." … "……임신 중지가 언제나 예외 없이 한 여성의 절실한 고민 끝에 나온 결정이라는 고정관념은 그것이 항상 절박한 상황에서 절박하게 취해져야만 하는 조치처럼 여겨지게 만들 수 있다." … "……이러한 논리 끝에 임신 중지가 고통을 수반하는 행위로만 가정된다면 우리의 주체성은 지워질 것이며, 타인의 선의에 의해 구조받는 나약한 존재로만 재현될지도 모른다. … 언니는 합평이 진행되는 내내 단 한마디도 하지 않은 채 억지웃음이라도 지어보려다 완벽히 실패한 얼굴로 나를 그저 바라보기만 했지요." (pp. 133~134)
이제 나는 더 솔직해지기로 한다.
임신 중지는 여성의 자기 결정권 대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관습적 대립이 아니라,
또 더 나은 미래를 보장해준다거나, 심사숙고 끝에 나오는 결론이라는 신화적 재현이 아니라,
진정한 주체의 선택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곧 희진 선배는 애써 담담한 척하다가 무너진다.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모임이 끝나고 스터디 룸을 나서려는 내게 희진 언니가 물었습니다. 다음에 하면 안 되겠느냐는 내 대답에 어깨를 으쓱인 언니는 고개만 끄덕였습니다. … 길목을 지나쳐 주차장으로 마저 내려가는 동안 나는 전화기를 꺼냈어요. … 결국 언니에게 메시지를 보냈습니다. - 언니 미안해요. 아무래도 다음 모임부터는 빠지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한참 후에야 메시지 수신음이 울렸어요. - 알겠어. 내가 괜히 부담만 준 거 아닌지 모르겠다… 미안해." (pp. 135~136)
희진 선배, 아니 희진 언니는 모임이 끝난 뒤 나에게 대화를 요청한다.
나는 대화를 거부하고 메시지로 모임에서 탈퇴하겠다는 소식을 전한다.
"헌법불합치 결정! 낙태죄는 위헌이다!
헌법불합치 결정! 낙태죄는 위헌이다! 2019년 4월 11일.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앞에서 마이크를 잡은 누군가가 간절한 목소리로 외쳤습니다. … 우리 병원 직원들 역시 환자 대기 공간에서 중계방송을 지켜보았고, … 중계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한 것은 붉어진 볼 위로 두 눈이 퉁퉁 부어 있는 희진 언니가 화면 한구석에 보였기 때문이었어요."
얼마 뒤, TV를 통해 낙태죄 헌법불합치 결정 소식을 듣는다.
중계 화면 한 구석 눈물을 흘리며 소리치는 희진 언니의 모습을 본다.
"그날 저녁, 퇴근을 한 나는 해수의 신혼집으로 갔어요. 남편이 당직이라 종일 혼자 지낸 해수는 고기가 당긴다고 했고 나는 마트에서 떡갈비를 사와 냉장고에 있는 양파와 파프리카 같은 것들을 꺼내 잘게 썰었지요. … "언니 우리 아기 본 적 있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사진을 건네받았습니다. …
"내도 그런 생각 해봤다" 이윽고 해수가 입을 뗐습니다. "너무 급한 거 아인가, 속도를 늦춰야 하나. 근데 못 그라겠데. 나는 이 사람이 너무 좋은데 혹시라도 그라믄 헤어질 거 같기도 하고 ……"라며 말끝을 흐린 해수는 … "우리 참 많이 다르잖아" 하고는 말을 이었습니다. "그래도 있지. 언니야. 이것도 내가 선택한 거다. 내는 내 가진 복 누리면서 살고 싶은데, 그게 꼭 잘못은 아니잖아." … "내는 그냥 행복하고 싶더라. 언니야도 안 그렇나?"
(pp.137~139)
TV로 낙태죄 헌법불합치 소식을 들은 날 저녁, 나는 해수의 집으로 향한다.
아기의 초음파 사진을 건네며 해수는, 본인도 임신 중지 생각이 있었음을 고백한다.
그러나, 곧 자신의 선택은 그것이 아니었음도 고백한다.
행복하기 위해서 선택했다고 한다.
"아마도 곧, 나는 해수와 성탄절 새벽을 맞이한 그 병원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따스한 나날일 테지만 날이 화창할지, 비로 흐릴지, 자욱한 먼지로 희붐하지만 할지는 아직 알 수 없습니다. 다만 확실한 것은 당신을 처음 본 순간부터 내가 당신을 사랑하게 되리라는 사실. 꼬물거리는 손으로 당신이 내 손가락을 잡자마자 나는 당신에게 속수무책으로 빠져들게 되겠지요.
하지만 나는 또한,
당신이 없는 지금 이곳을 상상합니다. 당신의 어머니, 그러니까 나의 동생 해수가 나와 함께 정동길을 걸으며 서로가 꿈꾸었던 미래를 이야기하던 그때와 다름없이, 우리가 나란히 각자의 두 발로 자기만의 길을 걸어가는 모습을 말입니다. 당신이 없는 그곳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다르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다른 세계에서도 당신에 대한 나의 사랑은 분명 굳건할 것임을." (pp. 139~140)
나는 해수의 아이를 떠올리며,
당신이 있을 때의 행복과 당신이 없을 때의 행복을 함께 상상한다.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는 이른바 낙태로 불리는 임신 중지에 대한 사회 인식 단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작품에서는 임신 중지와 출산이 죄나 행복을 특별히 대변하고 있지 않다고 지적하며, 특히 임신 중지가 여성의 자기 결정권 대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대립구도에 있는 윤리적 딜레마의 한 사례가 아니라, 개인의 온전한 선택이어야 함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개정안을 통해 바라본 임신 중지의 사회 인식은 여전히 개인의 온전한 선택보다는 불가피한 선택으로서의 임신 중지를 종용하는 듯하다.
작 중 희진이나 어머니의 말대로 경제적인 이유 또는 더 준비되었을 때,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임신 중지법은 임신 중지를 선택하는 순간에도 결국 미래의 모성애에 속박되고 만다. 개인의 영구적 선택이 아니라 미래의 모성애를 위한 대비라는 인식의 씨앗을 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정민 선배 사례는 임신 중지에 대한 끔찍한 이미지의 재현은 사회 속 뿌리 박힌 무의식이 개인의 선택을 얼마만큼 폭력으로 바꾸어 볼 수 있는가에 대한 단초를 준다.
비단 특정 사회만의 문제가 아니다. 작년 미국의 앨라배마주에서는 성폭행과 근친상간 피해로 인한 낙태까지 금지하는 법안이 통과되면서 큰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미국은 현재까지도 10개 내외의 주에서 임신 중지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남미, 중동, 일부 아시아 국가에서도 임신 중지를 법으로 금지하고 있어 최근 이를 둘러싼 갈등이 고조되는 추세다.
임신 중지는 정치, 경제, 종교, 문화의 다양한 규범이 충돌하는 교차점이다.
임신 중지는 전적인 찬성과 반대가 있을 수 없고, 그래서도 안 되지만 적어도 우아한 사회적 합의를 핑계로 선택의 자유를 볼모 삼으면 안 될 것이다.
출산과 임신 중지가 대척점이 아니라 연장선이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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