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몽
끔찍한 꿈을 꿨다.
티셔츠가 흠뻑 젖을 정도로 땀을 흘린 종수가 괴로워하며 잠에서 깼다. 무섭도록 깜깜하던 저수지의 밤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익숙한 방 안의 천장만 종수를 덮칠 듯 가깝게 내려와 있었다. 잠에서 깼지만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숨을 헐떡거렸다. 이내 상황 파악이 된 종수가 몸을 세웠다. 그리고 두 손과 몸으로 조심스럽게 시선을 내렸다. 불쾌하게 끈적거리던 피는 모두 씻겨 내려가고 없었다. 다만 사라진 건지 원래부터 없었던 건지는 알 수 없었다.
종수는 꿈에서 한 남자를 죽였다. 칼로 남자의 배를 푹 찌르고, 죽은 남자를 저수지에 던졌다. 누굴 죽인 건지, 무슨 이유로 죽인 건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았다. 그냥 개꿈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찝찝했다. 어제 송별 회식 이후의 일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간신히 침대에 걸터앉자 지난밤의 숙취로 머리가 어지러웠다. 빨리 모든 것을 선명히 기억해내야 했다. 종수가 괴로움에 머리를 싸맸다. 그러니까 어제, 종수는 A사에 출근하는 마지막 날을 기념하여 그간 친했던 직원들과 송별 회식을 했다. A사는 종수가 7년 넘게 근속한 회사였다. 작은 회사였기에 종수 같은 인재가 하나 빠지는 것만으로도 타격이 클 터였다. 이에 회사 사장을 포함해 각 부서의 장급들이 회식에 참석했었다. 평소 짝사랑했던 마케팅팀의 주희 씨가 오지 않은 것이 아쉽기는 했다.
1차를 끝내고, 몇몇 인원들이 걸러져 2차에 갔을 것이다. 그때부터 이미 술에 많이 취해 있었나 보다. 양쪽에서 팔을 붙잡혀 부축당하던 것만이 어렴풋이 기억났다. 아마 타 팀 새끼들은 의리 없게 다 집으로 내뺐을 것이고. 같은 팀 애들만 두세 명 남아 있었을 텐데... 아무렴 술에 취했다고 해도 가족같이 지내던 애들을 해쳤을 리가...
그래, 개꿈이다. 종수가 불안을 가라앉히고 침대에 다시 누웠다. 꿈이 너무 생생하다 보니 별 걱정을 다 했다. 그제야 협탁에 올려놓은 숨 죽은 핸드폰이 보였다. 어쩐지 조용하다 싶었더니 배터리가 다 나가서 그랬던 모양이었다. 충전기에 연결하자 몇 분도 안 되어 액정에 불이 들어왔다. 문자함에는 핸드폰이 꺼진 동안 온 듯한 부재중 전화 알림이 있었다. 팀의 막내 진영이었다. 종수가 곧바로 전화를 걸었다.
“팀장님. 어제 잘 들어가셨어요?”
“어, 진영아. 잘 들어갔어. 어제 너무 취했다. 너네는 잘 들어갔지?”
“네... 근데 혹시 이현수 과장님이랑 연락되세요?”
이현수 과장? 진영의 입에서 나온 말에 종수가 잠시 얼어붙었다. 누워 있던 몸을 벌떡 일으켜 세웠다. 그 이름 하나에 다시 온몸이 긴장했다. 그러고 보니, 이현수라면 어제 회식에 참석했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면서도 자신과는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 설마 아니겠지. 치미는 불안함을 감추고 태연하게 물었다.
“이현수 과장? 아니? 따로 전화 안 해봤는데? 왜?”
“아... 오늘 출근 안 하셔서... 혹시 무슨 일 있었나 해서요...”
“그래?... 글쎄... 난 모르는데.”
“앗... 마지막에 집 가실 때 두 분만 따로 하실 말씀 있으시다고 같은 방향으로 가셨던 게 기억나서... 쉬시는 데 연락드려서 죄송합니다!”
진영의 전화를 끊은 종수는 밀려드는 불안을 감출 수 없었다. 분명 아닐 것이다. 무조건 아니어야만 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2차 이후의 모든 기억이 새까맣게 지워져 있었다. 하필이면 자신이 제일 싫어하는 이현수라는 점도 불안을 더 가중시켰다. 아무래도 직접 확인해야겠다. 결심한 종수가 의자에 아무렇게나 걸어둔 점퍼에 팔을 급하게 끼웠다. 서둘러 밖으로 뛰쳐나온 종수가 택시를 잡아탔다.
저수지에 내린 종수가 밑으로 뛰어 내려왔다.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한낮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혼자만 이질적인 표정을 하고 있는 종수가 눈치를 봤다. 어제 무슨 일이 있었을 거라곤 상상도 되지 않을 만큼 조용하고 평화로운 모습이었다. 경찰차 같은 거 한 대 없는 거 보면 아직 시체가 발견되지 않았거나 아님 이 모든 게 개꿈이거나였다. 어쨌거나 종수에겐 뭐가 됐든 다행인 상황이었다.
익사 사고 주의. 이 고요한 저수지가 대체 몇 명의 사람을 집어삼킨 것인지, 수변에는 펜스와 표지판이 살벌하게 서 있었다. 그래도 이왕 온 이상 제대로 확인해보고 싶었다. 종수가 펜스를 넘어 우거진 풀 속으로 발을 디뎠다. 자칫하다 빠질지도 모르는데 점점 저수지 근처로 향하는 종수를 몇몇 사람들이 걱정스럽게 힐끔거렸다. 종수가 눈을 감고 위치를 떠올렸다. 여기서 더 오른쪽. 산이 보이고 살짝 턱이 있는 곳. 조심스럽게 발을 옮긴 종수가 시뮬레이션하듯 팔을 휘저었다. 정확히 이곳에서 팔의 반동을 이용해서 시체를 물속으로 던졌다. 만약 그렇다면 던지는 사람은 피를 흠뻑 뒤집어썼을 것이다.
종수가 불안한 얼굴로 발 밑을 내려다보았다. 흙과 낙엽 사이로 다 흡수된 건지 핏자국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 그렇지... 다행이다. 약간은 맘을 놓은 종수가 떨리는 손을 내려놓았다. 그러나 여전히 맘 끄트머리의 해소되지 않은 불안함이 남아 있었다. 왜 한 번도 와본 적 없던 이 저수지가 하필이면 선명하게 꿈속에 나타난 걸까.
저수지 앞에서 두리번거리던 종수의 시선이 문득 어딘가로 꽂혔다. 꿈속에서 종수가 피에 젖은 손을 씻어내던 수돗가였다. 또다시 불안이 종수의 뒤통수를 세게 내리쳤다. 아닐 거야. 종수가 다시 빠른 걸음으로 수돗가로 향했다. 아까는 펜스를 넘어 위험하게 저수지 앞에 있더니, 이제는 뭐에 홀린 듯이 수돗가로 뛰어가는 종수를 커플이 이상하다는 듯 지켜봤다.
수돗가에 도착한 종수가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색다를 게 없는 평범한 수돗가였다. 종수는 그제야 허탈함과 안도를 동시에 느꼈다. 만일 진짜 이곳에서 피를 씻었다고 해도, 이미 다 씻겨져 내려갔을 텐데 증거 같은 게 있었을 리가. 종수는 자신이 공포심에 사로잡혀 괜한 발걸음을 했다고 생각했다. 김종수. 아침부터 별짓을 다 했구나.... 어이없다는 듯 웃었다. 이왕 온 김에 땀에 젖은 손이나 씻으려 종수가 수돗가로 가까이 다가갔다. 그러나 수도꼭지를 비틀어 물을 틀려던 종수가 이내 하얗게 질렸다.
언제부터 있었는지 수도 밑바닥에 익숙한 금색 물건이 뒹굴고 있었다. 시계였다. 그것도 종수의 것과 동일한 모델이었다. 벌이가 변변찮은 A사 직원들 사이에선 감히 꿈도 못 꾸는 고가의 시계. 종수를 은근 무시하는 부하직원들에게서 종수의 권위를 지켜주던 중요한 시계. 종수가 뒤늦게 제 손목을 쳐다보았다. 웬일로 늘 감겨 있던 손목 부근이 허전하게 비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