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현준, '공간이 만든 공간'
p. 54
밀과 벼는 재배 방식에 차이가 있으며, 이 재배 방식의 차이가 가치관의 차이를 가져온다. 일반적으로 벼농사 지역은 집단의식이 강하고, 밀 농사 지역은 개인주의가 강하다. 그 이유는 버지니아대학 토머스 탈헬름 교수의 논문 '벼농사와 밀 농사에 따른 문화적 차이의 증거'에 잘 설명되어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벼농사는 비가 많이 오는 지역에서 이루어지는데, 이때 많은 물을 다뤄야 하기에 치수를 위한 토목 공사가 많이 필요하다. 물을 담는 작은 저수지인 '보'를 만들어야 하고 모내기도 집단으로 모여서 한다. 벼농사를 지을 때는 저수지나 다른 사람의 땅에서 사용한 물을 내 논으로 내려받아서 사용하고 다시 그 물을 물길을 내어서 이웃의 땅으로 전달해 주어야 한다. 벼농사에서는 농사에 가장 중요한 물을 함께 힘을 합쳐서 공동으로 사용해야만 한다. 시기를 놓치면 농사가 어려운 품종이기 때문에 노동의 형태도 집단적으로 집중해서 심고 태풍이 오기 전에 집중적으로 추수하는 형식을 띤다.
이러한 노동의 과정을 통해서 벼농사 지역은 자연스럽게 공동체 의식과 집단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게 된다. 벼농사는 옆에 있는 이웃과 잘 지내지 않으면 지을 수가 없다. 다른 말로, 이웃과 잘 지내지 않으면 생존을 위협받는 것이 벼농사 지역에서의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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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해보면 벼농사를 지었던 사람들은 농사짓는 방식 때문에 결속하고, 집단의식을 키우고, 주변인과 협업하도록 가치관과 시스템이 발달해 왔다.
반면 밀 농사는 씨 뿌리는 모습부터 다르다. 벼농사를 지을 때는 함께 줄을 맞추어서 모를 심지만, 밀 농사 지을 때는 땅 위를 혼자 걸어 다니면서 씨를 뿌린다. 집단으로 모여서 일하는 경우가 적다. 밀은 맨땅에서 자라고 물이 많이 필요하지 않고, 비가 집중호우 없이 적당히 고루 내리는 지역에서 농사짓기 때문에 관개수로를 만들 필요도 없다. 서로 협력할 필요도 없고 모여서 살 필요도 적다. 자연스럽게 밀 농사를 짓는 사람들은 관개수로 토목 공사를 하고 집단 모내기를 하면서 벼농사를 짓던 사람에 비해 개인주의적인 성격이 만들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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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여행을 가면 자연 속에 오두막이 띄엄띄엄 있는 평온한 시골 풍경을 볼 수 있는 반면, 동양의 시골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모습이다. 농사 방식은 마을의 풍경도 다르게 만들었다.
노동 방식이 문명의 성격을 결정지은 것이다.
알쓸신잡을 보다가 '우리나라는 개인을 참 무시해요'라는 이 장면과 사례는 강렬하게 기억되었다. 우리나라는 왜 개인의 가치를 가볍게 여길까? 왜 조금만 달라도 비난하고, 공동체라는 이름으로 많은 모임이 생겨날까? 동네마다 있는 지역 향우회, 동문 모임, 인터넷 동호회 모임까지! 이 장면의 해답과 역사를 책에서 만났다.

공동체를 중시하는 동양 사회에서 개인은 '우리'라는 다수에 비해 너무나 작은 존재다. 동양 사회는 소수보다는 다수를 위한 시스템이고, 그래야만 생존이 가능한 '벼농사' 사회였다.
반대로 굉장히 'cool'하게 느껴졌던 서양의 개인주의의 비밀은 밀이라는 작물 특성에서 비롯되었다. 사람들의 생각과 행동 깊숙한 곳에는 문명의 역사가 흐른다. 아빠 세대와의 소통의 어려움은 개인과 개인과 문제라기보다는 시대와 시대라는 장벽이 가로막고 있는 것이다.
임홍택 작가의 '90년생이 온다'라는 책에서 지금의 90년대생이 특성을 말하기 전에, 자라온 배경과 처한 현실을 먼저 소개하는 부분도 서로의 '역사'를 알아야 세대 간 '경험의 차이'를 이해할 수 있고, 소통할 수 있기에.
건축이라 하기에 너무나 인문학적이고, 사람이 만든 건축은 사람의 생각과 현실, 역사를 반영하기에~유현준 작가의 책을 기다리는 이유이고 천천히 음미하는 이유이다.
https://www.youtube.com/watch?v=uOs3k2XgVfk&t=12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