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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피와 상실

레프 톨스토이, '안나카레니나 1'(민음사)

by 그럼에도

p. 434

당신은 나와 터놓고 이야기하려 하지 않는군. 그는 마음속으로 그녀를 향해 이렇게 말하는 듯했다. 그럴수록 당신에게 좋지 않아. 이제 당신은 내게 간절히 부탁하겠지. 하지만 난 내 속을 털어놓지 않겠어. 그만큼 당신에겐 좋지 않을걸.


그의 모습은 마치 불을 끄려고 헛되이 애쓰던 사람이 자신의 헛수고에 화를 내며 '꼴좋군! 그것도 그렇게 다 태워 버려!'하고 말하는 것 같았다.


직무에서는 그처럼 총명하고 빈틈없는 그도 아내에 대한 그러한 태도가 얼마나 어리석은지는 전혀 깨닫지 못했다. 그가 이 사실을 깨닫지 못한 것은, 자신의 현재 처지를 깨닫는 것이 그에게 너무나 두려운 일이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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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하여 그는 마음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 뒤 봉인을 해버렸다. 다정한 아버지였던 그는 그 겨울이 끝날 무렵부터 아들에게 유난히 냉담해지기 시작했고, 아들에게도 아내를 대할 때처럼 조롱하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그는 아들을 '어이! 젊은이!'라고 부르곤 했다.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올해만큼 직무가 많은 적이 없었다고 생각했고, 또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올해 일부로 일거리를 만들고 있다는 것, 그것이 아내와 가족에 대한 감정이나 생각이 든 상자를 열지 않는 방법 가운데 오래 담아둘수록 점점 더 두려운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했다.


+ 중략


그리고 그는 아내가 왜 벳시가 사는 차르스코예로, 브론스키가 속한 연대의 야영지에서 멀지 않은 차르스코예로 가겠다고 유난히 고집을 부리는지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또 이해하지도 못했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생각하려 하지 않았고 실제로도 그렇게 했다. 물론 이 문제를 스스로에게 말한 적도 없고 어떤 증거나 의혹도 갖고 있지 않았지만, 그는 자신이 배신당한 남편이라는 것을 마음속 깊이 느끼고 있었으며 이로 인해 매우 불행해했다.


아내와 행복한 생활을 누리던 지난 8년 동안, 알릭세이 알렉산드로비치는 다른 부정한 아내들과 배반당한 남편들을 보면서 마음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린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어떻게 이렇게 되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어째서 이런 꼴사나운 상황을 해결하려 하지 않는 걸까?


하지만 그런 재앙이 그의 머리 위에 떨어진 지금, 그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전혀 생각나지 않을 뿐 아니라 그런 상황을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다. 그가 그 상황을 알고 싶어 하지 않았던 이유는 다름 아니라 그것이 너무나 끔찍하고 너무나 부자연스럽게 여겨졌기 때문이다.


+ 중략


의사는 하얀 손으로 새끼 염소 가죽장갑의 손가락을 집어 손에 끼면서 말했다.

현을 팽팽히 조이지 않은 채 그것을 끊으려 해 보십시오. 대단히 힘들겠죠. 하지만 현을 최대한 팽팽이 잡아당긴 후 그 위에 손가락만 한 추라도 올려놓으면, 현은 결국 끊어지고 말 겁니다. 그는 업무에 대한 강한 끈기와 열성 때문에 극도로 긴장되어 있습니다. 그리고 외부로부터 오는 압박이 있습니다. 그것도 어떤 아주 무거운 압박 말입니다.

* 방어기제 : 심리 두렵거나 불쾌한 정황이나 욕구불만에 직면하였을 때 스스로를 방어하기 위하여 자동적으로 취하는 적응 행위. 도피, 억압, 동일시, 보상, 투사 따위가 있다.

- 표준국어대사전 -


한 친구와 멀어지게 되었다. 그 친구는 장문의 메시지를 보냈다. 이동 중에 언뜻 보니, 좋았던 추억과 미사여구로 가득한 글이었다. 차를 멈추고, 다시 그 글을 읽은 후에는 너무 놀라게 되었다.


20년 가까운 오랜 우정을 나누던 사이였다. 그동안 서로에게 알게 모르게 불편한 감정을 갖고 있었겠지만, 내 기억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참는(?) 상황이 오랜 기간 지속되었다. 한 번도 다툰 적이 없었고, 불편함을 서로 표현한 적은 없었다. 하지만 최근 대화에서 더 참기 힘들었고, 그 친구와의 대화를 피하고 있었다.


불편함을 언어로 표현하기도 전에 그 친구의 예리한 시선으로 내가 달라졌음이 포착되었다. 그리고 그 친구에게 처음으로 장문의 메시지를 받은 것이었다. '난 원래 표현이 그렇고~육아로 바쁘고, 팀장이라는 업무로서 언어가 그렇고, 요새 집에서도 힘든 일이 많았어. 그러니깐 네가 다 이해해. 사랑한다~친구야.'로 마무리지은 글이었다.


일방적으로 혼자 참는 관계를 지속하라는 건가? 눈치가 빠른 친구였다. 그리고 본인도 그 불편한 그 무엇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넘어갔다. 그리고 같이 함께한 시간을 강조하면서, 앞으로도 오래 보자는 말이었다.


나 역시 그 친구와 비슷했다. 오래 만나왔고, 앞으로도 오래 만날 사이라는 이유로 불편함과 오만한 말들을 듣고도 화를 내는 것과 같은 그 어떤 대응도 하지 않았다. 소설 속 알렉세이 알렉산드로비치가 아내의 달라진 모습을 애써 바라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처럼, 나도 이 불편함을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았다. 오히려 내가 너무 예민한 게 아닐까 하며 스스로를 잠재우려 했다. 내가 이 불편함을 들여다보고 또 표현한다면, 관계가 깨지지 않을까 하는 조심스러운 생각이 스스로를 부정하는 가림막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현이 팽팽히 당기면 작은 충격에도 끊어지듯이, '작은 어떤 일'이 도화선이 되어서 그 관계도 끊어진다. 이미 금이 간 그릇은 시간이 쌓인다고 붙지 않는다. 시간이 흐를수록 더 많은 금이 가고, 흠집이 생겨났다. 작은 충격에도 산산조각 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타인을 바라볼 때는 너무나 쉽고, 당연한 것들은 실상 나의 일이 되면 한없이 어려운 것이다. 특히 감정이라는 미묘한 것을 바라보는 것은 타인에 대한 공감뿐만 아니라 나에 대한 공감도 그렇게 어려운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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