깊이에의 강요

파트리크 쥐스킨트, '깊이에의 강요'

by 그럼에도

https://www.youtube.com/watch?v=J9yOHZJarn0

평론가 : 그녀에게는 깊이가 없어요. 사실이에요.
나쁘지는 않은데, 애석하게 깊이가 없어요.
Burne-Jones, ‘Lady Picking Flowers’
소묘를 잘 그리는 젊은 화가 : 왜 나는 깊이가 없을까?

소묘를 잘 그리는 젊은 화가 : 그래 맞아, 나는 깊이가 없어!



타인의 목소리에 지나치게 귀를 기울였다. 소설 속에서 젊은 화가는 평론가의 말에 영혼을 빼앗기고, 결국 인정하고, 생을 마감했다. '깊이'에 대한 강박이 재능 있는 화가를 추락시켰다. 그것도 너무 비참하게.


나 역시 그래 왔다. 나보다 타인의 말을 잘 듣고, 되새김질했다. '나보다는 나를 객관적인 시각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몸에 좋은 게 입에는 쓰다' 등등의 교과서적인 믿음을 갖고 있었다. 타인의 말을 무시하고 살 수는 없지만, 잘못된 믿음은 오랜 시간 사이비 종교에 빠진 것처럼 나를 망가뜨렸다. 사람들은 장점은 작게 보고, 단점이나 결핍의 요소만 확대하는 돋보기를 들이댄다. 본인은 모든 걸 다 갖추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쉽게 말한다. '너는 이게 문제야'.


그런 말은 의도적인 경우도 있지만 생각 없이, '그냥'일 때가 많다. 이 책 보다 더 리얼한 현실 버전을 꼽자면 그건 연예인 관련 댓글이다.


'재밌지만 진지하지 못하고~', '예쁘지만 매력 없는', '진중하지만 재미없는', '친근하지만 카리스마 없는 동네형', '발랄하지만 너무 가벼운'등등


어쩌면 인간이 다 가질 수 없는 완벽한 조건을 말한다. 예쁘고, 매력 있고, 흔한 매력, 카리스마, 큰 키, 수더분함, 활발함, 배려 등등


신입사원 때 선배 직원의 가족과 저녁 모임을 하던 중에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결혼해보니, 연애 때 장점이 결혼 후 단점, 연애 때 단점이 결혼 후 장점'이에요~"


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뭔가 의미심장하지만 그때는 들으면서도, 그 의미를 잘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이해하지 못한 말은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리고 그 말의 의미를 한참이 지나서 이해하는 날이 왔다. 결혼은 안 해봤지만^^;;


내향적인 사람은 외향적인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세세한 장면을 볼 수 있는 능력, 배려할 수 있지만 낯선 사람들과의 잘 어울리는 사교성은 부족한 경향이 있다.


외향적인 사람은 분위기를 up 시키는 활발한 사교성이 장점이라면, 외부에 치중하다 보니, 내부적인 문제에는 소홀한 경향성이 있다. 거기다 말이 많은 만큼 말실수나 누군가의 오해를 살 가능성도 있다.


결국 내향적인 사람도, 외향적인 사람도 완벽하지 않다. 빛과 그림자처럼 각각의 장점이 주는 단점, 단점이 주는 장점이 있을 뿐. 그런데 나는 상반된 두 가지를 원했다. 사람에 대한 이해와 경험의 부족은 잘못된 생각과 행동으로 이어진다. 사람은 신이 아닌데.


모순. 내가 가지지 못한 외향성과 매력을 원했다. 나만의 독특한 시선과 직관을 '운'으로 폄하한 적도 있었다. 어떤 날은 타인의 말을 서운해하고 부정했다가, 다음에 좋은 결과가 나오지 않았을 때는 타인의 말처럼 그렇게 인정해버렸다.

조병왕, Geometric knife drawing’


난 왜 이렇게 부족한 걸까?


사람에 대한 경험과 후회가 오래 쌓인 지금은 예전처럼 '타인의 칩입과 같은 모진 말과 참견'을 쉽게 인정하지 않는다. 아니, 않기로 했다.


두 달에 한 번 꼴로 전화가 오는 남자 사람 별별이가 있다. 예전엔 다들 유부이니, 혼자 싱글인 나를 걱정해주는 줄 알았다. '누나는 이게 문제야~'로 시작하는 잔소리로 시작해서, 끝말은 '다음에 언제 만날까?'로 끝나는 시추에이션. 물론 잘 만나지는 않았다. 모임의 멤버들과의 만남에 재미가 사라졌다.


아무리 코로나 세상이라고 해도 연락도 잘 안 하고, 만남도 피하는 것을 대놓고 욕을 못하고, '누나가 미혼인 이유로 돌려서 욕하는 상황'임을 알게 되었다. 험담은 언젠가 당사자에게 전달된다. 단, 그 말을 한 별별이만 모른다. 내가 알고 있다는 것, 그리고 별별이가 통화할 때는 일부로 집 안을 왔다 갔다 거리며, 산만하게 듣는다는 것을, 그렇게 흘려들으려 노오력한다는 것을.


그럼에도 워낙 가시 돋친 말들을 뱉어내니, 그런 딴짓에도 가슴에 콕콕 박혀 상처가 며칠 동안 낫지 않는 날이 있었다. 다음에는 '별별이 전화는 받지 말아야지'하고 다짐했을 만큼. 하지만 돌려서 생각해보면 나의 많은 단점 중에 별별이가 말한 단점, 다른 사람들이 말한 엄청난 단점은 오직 '미혼'이었다. 얼마나 단점이 없는 사람인가? 결혼 유무 이외에 단점이 없다니. 물론, 사람들의 관심사가 '결혼'이외에 없기도 하지만^^ 그렇게 다르게 상황을 바라보기로 했다.


그리고 나 역시 세상 완벽함을 기대하는 그런 마음도 고이 접어버렸다. 나에 대해서도, 타인에 대해서도 말도 안 되는 세상의 조건을 끼워 맞추지 말아야지.


사람들이 말하는 하이힐처럼 높고도 까다로운 조건들. 억지로 구겨 넣은 큰 발과 작은 구두 같은 불편함 말고 내 발에 맞는 신발을 신기로 했다. 뛰어다니기 좋을 만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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