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속에 내 마음 두 스푼> 정여울, '공부할 권리'

p. 60
<고통으로부터의 도피>
여기저기서 힐링 열풍이 거센 요즘, 이 요란한 힐링 열풍에는 뭔가 불편한 광기가 스며 있습니다. 그 불편함의 정체는 뭘까요? 아픔에 대한 성급한 알레르기 반응이 아닐까요? 아픈 것은 '정상적인 것'이 아니라는 듯한 조바심, 아픔은 무조건 제거해야 할 대상이라고 믿는 조급증. 아픔의 의미를 곱씹어 보기도 전에 아픔을 무차별적으로 퇴치하려는 성급한 통제의 욕망이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통증은 공포를 자아내지만 분명 우리에게 어떤 절박한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그 통증의 메시지를 우선 가만히 들어 보는 일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아닐까요?
의학은 고통을 치유해 오기도 했지만 의학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고통에 대처하는 면역력을 떨어뜨린 측면도 있지요. 견딤의 가치는 퇴색하고, 효과 빠른 진통제의 중독성은 커집니다. 작은 고통에도 쉽게 건강염려증에 시달리고, 과잉 진료의 폐해도 급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쉽고 빠른 진통제만 찾다가 놓치는 건 뭘까요? 바로 고뇌하고 진통하는 능력입니다. 현대인은 아픔에서 도망치느라 아픔이 가르쳐주는 진실을 외면해 온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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융은 현대 문명의 가장 고질적인 문제로 '악으로부터의 도피'를 꼽았습니다. 각종 대재앙이 닥칠 때마다 현대인들은 편리한 대증요법(겉으로 드러난 병의 증상에 대응하여 처치하는 치료법)으로 순간의 고통을 망각하며 악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피해 왔다는 것입니다. 도저히 극복할 수 없는 악과 만났을 때 우리는 더 이상 악으로부터 도망칠 것이 아니라 악의 뿌리를 탐구해야 합니다.
자본주의 문명은 악에 대한 성찰 자체를 가로막음으로써 악을 치유할 기회조차 놓쳐 왔습니다. 융은 개인이야말로 사회의 구조적 병폐를 치유할 수 있는 최고의 주체라고 보았습니다. 겨우 한 사람이기 때문에 아무 힘이 없는 것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의 통렬한 반성과 냉철한 비판이 모여 세상을 좀 더 낫게 할 수 있다고 본 것이지요. 엄청나게 소란스럽지만 어쩔 수 없이 무기력한 익명의 대중성 뒤로 숨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싸워야 할 악의 뿌리를 향해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전력투구할 때 구원은 시작될 수 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고, 생각하고, 조금 더 시간을 갖는 것. 그리고 충분히 아파하고, 쉬고, 깨닫는 것
by 소소로움
< 코로나 나우: 하루하루 질본의 노력과 마음에 감사합니다. 오늘도, 내일도 사회적 & 인간적 거리두기 & 마스크 & 집안에서 활동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