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 담아낸다는 것

정여울, '끝까지 쓰는 용기'

by 그럼에도

p.281

실수도 모험도 해보고, 깨지고 넘어지면서 그게 자연스럽다는 것을 알아가는 과정이 성숙해지는 거잖아요. 그런데 항상 두 주먹 꽉 쥔 채 살았으니까 긴장을 풀지 못했던 거죠. 릴랙스가 되어야 열정을 쏟아부을 또 하나의 에너지가 생기는데 계속 힘만 주고 살고 있었던 거예요.


온 마음을 다해서 바랬었나 보다. 피아노 곡을 검색했다가 유튜브 알고리즘, 구글 신의 계시를 받고 어딘가로 빨려 들어갔다.


https://www.youtube.com/watch?v=XtKwzLU33kU

임현정, 드뷔시 '아라베스크'

그렇게 이 곡을 알게 되었다. 선생님께 말씀드려서 이 곡을 배우다가 지난주는 임현정 렉처 콘서트에 다녀왔다. 뭔가 알 수 없는 마법에 걸린 기분이다. 피아노 연주는 특별한 사람(?)의 취향인 것 같았다. 피아노를 배우기는 하지만 공연에 갈 생각은 하지 못했다. 알고리즘의 마법에 빠진 공주처럼 앞자리에 앉아서 곡에 대한 해설과 연주를 듣고 나오는 이 경험과 기분이 낯설고 흥분되었다.


나라는 사람이 낯설어질 때가 있다. 처음 보는 나를 마주하게 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은 새로운 경험을 한 날이었다. 내가 그동안 '나'를 규정했던 몇 개의 단어들로 설명이 안 되는 날!


MBTI 유형이 사람들의 대화와 SNS에 보인 지 오래다. 나의 유형은 I로 시작했던 거 같은데 이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너무 오래전에 검사해봤던 거라 지금도 같은 유형으로 나올지는 의문이다. 과거 3~4년 전의 나와 지금의 나의 관심사와 취향이 달라졌고 거기다 MBTI에 좀처럼 관심이 없다. 그건 마치 중학교 교복처럼 다른 사람들과 똑같은 옷을 입는 것 같았다. 몇 개의 단어가 나를 규정짓는 것에 익숙해지기 싫었다.


나는 무색무취한 사람으로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공리주의'에 입각한 것도 아니면서 다수의 생각과 관심사에 나를 맞추어 왔다. 모나지 않고, 둥근 사람으로 살고자 했고 정말 그렇게 살았다. 내 옆 사람의 취향에 나를 맞추고, 나를 낮추고 그러다가 내가 사라지는 시간을 맞이했다. 존재감 없는 그냥 그런 사람이 돼버렸음을.


p.280

진정한 독립은 경제적 독립뿐만 아니라 타인의 시선에서 독립하는 것이죠. 착해 보여야 한다는 생각, 어여쁨을 받아야 한다는 생각, 사랑받고 싶다는 생각에서 독립하는 게 진짜 어렵더라고요. 그냥 부모님의 사랑에서 독립하는 게 어려운 것이 아니라 잘 보이고 싶은 생각, 인정받고 싶은 생각, 그래도 중간은 해야지 하는 생각에서, 그 강력한 초자아에서 벗어나는 게 저는 훨씬 어려웠어요.


실제로 저를 가두는 감옥이 없는데, 보이지 않는 감시와 처벌의 감옥이 늘 저를 따라다니는 느낌이었어요.


정여울 작가님의 글에서 내가 보였다. 착해 보이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사랑받고 싶다는 내면 아이의 욕심과 갈증이었을까? 타인의 인정이란 것은 이룰 수 없는 욕망이었다. 갈증이 나서 마신 바닷물은 더 큰 갈증을 불렀다. 타인이 아닌 나의 시선으로 나를 인정하고 알아가고 있다.


나를 알아가는 과정, 하나씩 채워가는 과정은 재밌고, 시시하고, 실망스럽고도 낯선 경험의 연속이다. 소소하고, 느리고 어색하기도 한 일상. 8~9살 때 외가에서 살면서 보았던 장면, 24살 보습학원에서 일하던 휴학생의 나, 25살 늦은 회식을 끝내고 어두운 길을 조심스레 걷던 모습까지... 내 마음속에 봉인되었던 비밀의 화원이 열리는 기분이다. 갑자기 왜 예전 생각이 떠오를까? 과거의 좋았던 경험이 아닌 힘들거나 아팠던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다. 못 본 척하면서 쌓아두었던 일들을 굳이 꺼내어볼 만큼 내가 힘이 생긴 건 아닐까?


글을 쓰면서 좋은 점은 과거의 나, 현재의 나를 들어 올리고 그때는 보지 못했던 장면과 의미를 알게 된다는 것이다. 스쳐갔던 나의 에피소드에 어떤 의미를 덧붙여서 층층이 쌓아 올리는 기분이랄까.

쓴다고 다른 세상 속의 나로 변신하는 것은 아니지만 쓰면서 특별한 나로 변화하는 마음이다. 책 제목처럼 '끝까지 쓰는 용기'는 소소한 나를 조금씩 나아가게 한다.

실수하며 보낸 인생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보낸 인생보다
훨씬 존경스러울 뿐 아니라 훨씬 더 유용하다.

- 조지 버나드 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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