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당신께만 특별히 알려주는 고급 정보라며 속삭이는 귓속말에 일개미들은 나비가 되어 비상할 것을 꿈꾸며 눈이 먼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에게 한사코 권하는 것은 그 누군가에게 이익이 되는 일이고, 나에게 이익이 되는 일은 남들이 한사코 감추고 있는 게 세상의 비정한 이치다.
- 문유석, '개인주의자 선언' -
'간절하면 이루어진다'라는 이야기로 베스트셀러였던 '시크릿'이라는 책이 있다. 누군가에게 책을 선물 받았으며, 회사에서는 워크숍에서 1시간을 '멘털 트레이닝(?)'에 가까운 시크릿 동영상을 보면서 토론을 하는 시간까지 가졌을 만큼 대단한 인기가 있었다.
나의 간절함이 부족해서였을까? 그때 썼던 일기를 보니, 쓴 것 중에 이루어진 것은 대학원 가는 것 하나를 빼고 이루어진 것이 없었다. 당황스럽게도 요새 적고 있는 글과 그 당시에 적었던 '해야 할 일 목록'이 같다는 것... 다른 점은 그때는 적기만 했고, 지금은 쓴 것의 1~2개로 실행한다는 것이다.
작년 도쿄올림픽에서 한국 여자배구 경기를 보면서 '간절하면 이루어진다'라는 말이 현실이 되는 것 같았다. 김연경의 리더십과 선수들의 팀워크는 스릴감과 함께 희망을 주었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 그런데 스포츠와 현실 세계는 다른 것 같다.
사기라는 죄목의 다양한 원인에는 '간절함'이 보인다. 이 돈을 벌기 위해 갖은 고생을 한 사람이 돈을 불리기 위해서 간 곳, 그중에서도 가장 안전할 것이라는 믿음을 주던 은행은 특정 펀드에 고객의 돈을 넣고, 은행원은 승진을~피해자는 원금이 눈 녹듯 사라지는 충격을 감당해야 했다. 부자들에게 '투자 손실'은 경험의 일부지만 서민에게 '투자 손실'은 살아갈 이유를 잃어버리는 것이다.
인턴사원에게 정직원이란 무엇인가? 인턴이라는 기회는 언젠가는 정직원을 향해 가는 발판이 된다. 열정을 넘어서 영혼까지 갈아 넣으려는 그들의 마음에 '정직원'이라는 합리적인 목표를 미끼로 삼는 인간이 있다. 이들은 사람이라는 표현보다는 '인간'이라 쓰는 것이 더 맞을 것 같다. 정직원 채용 예정도, 가능성도 없는데 장밋빛 미래라는 낚시를 드리우는 사람들. 그들은 누군가의 간절함을 도구로 활용한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는 문장을 종교처럼 믿어서는 안 된다.
간절하게 본인의 실력을 쌓는 것은 '지적 자산'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간절함에 사회적 무경험과 세상에 대한 무지가 더해지면 그것은 '치명적인 아킬레스 건'이 된다. 사람들은 자신의 약점을 찾는 것은 오래 걸리지만 타인에 대해서는 귀신같이 알아차린다. 그 사람이 가장 원하는 것, 가장 약한 곳을 건드려주면 가장 빠르게 그들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을. 세상엔 선한 사람도 있지만 누군가를 이용하는 악한 사람도 있다. 월급을 받고 한 살 한 살 나이가 들면서 악한 사람(?)을 이해하고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거를 수 있는 능력이 '영어 점수'올리기보다 더 중요함을 깨달아간다.
'개인주의자 선언' 은 꺼내어놓고 싶은 문장이 너무나 많지만 가장 최근에 다시 읽었던 이 구절이 깊게 뇌리에 박혔다. 팀에 빠르게 적응하고자 했던 내 열정은 아킬레스 건으로 오래 작용해왔다. 누군가에게 가장 좋은 먹잇감이 되었다. 나만 몰랐던 나의 아킬레스 건.
회사에 들어선 날부터 내향성에서 외향성의 옷으로 갈아입고 오랜 시간을 살아왔다. 이젠 내향성 옷을 입고 나로서 살아가기로 했다. 인생의 중심축을 바꿨으니까. 적응 또는 팀워크이라는 이름보다는 균형으로. 그래서일까? 예전처럼 반응하지 않는 내 모습에 사람들이 당황하기 시작했다. 이 정도(?) 멘트면 이렇게 나와야 하는데 스케치북이 무반응이라니?
이젠 간절함이 덜해졌다. 간절한 그 무엇이 타인의 시선에서 나의 시선으로 바뀌었다. 내가 해야 할 일, 하고 싶은 일이 더 간절해졌다. 평생직장도 사라진 세상에서 지금 옆에 있는 사람을 평생 볼 일은 없을 것이다. 있는 동안 '편하게 잘~지내자'가 나의 슬로건이 되었다. 그럼에도 나는 간절히 바라는 것이 있다. 바란다. 내가 정말 잘 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