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길영, '그냥 하지 말라'
p.219
너 누구니?
에 대한 답을 얻고 싶어 하는 것입니다. 나라는 존재에 의미를 두는 거죠.
그런데 이게 정말 어렵습니다. 자존감에 관한 책을 읽어봐도 명상을 해봐도 쉽지 않습니다. 타인의 기대와 목표를 교육받고 살아오다가 갑자기 내 삶의 주도권을 가져와야 하니까요.
미래 인간의 업은 콘텐츠 크리에이터이거나
플랫폼 프로바이더 거나
이제는 스스로의 흔적을 남기고 성장의 기록을 채록하는 것이 곧 나의 프로파일이 될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무엇을 해야 할까요?
첫째, 직접 하셔야 합니다.
둘째, 기록으로 남겨야 합니다.
그 성장 과정이 나의 자산으로 환금될 것입니다. 일종의 사회 문화적 자본이니까요. 그리고 그게 나의 업이 될 테니까요.
부산에 내려와 보니 거의 사계절 꽃을 만날 수 있다. 다른 지역보다 일찍 만나는 꽃도 있고, 다른 지역에서 보기 힘든 겨울에 피는 꽃도 볼 수 있다. 그것도 아파트 1층 화단, 동네 가로수처럼 일상 가까이에서~꽃
내 마음의 온도는 아직 초봄인데, 밖에선 벌써 벚꽃이 피기 시작했다. 모든 꽃은 각각의 아름다움이 있어서 어떤 꽃이 가장 예쁘냐는 질문은 정말 고민스럽지만 그럼에도 꼭 하나를 꼽는다면 5월에 만나는 작약이다. 왜 인지도 모르지만 겹겹이 쌓인 꽃잎과 연분홍의 색, 향기에서 그냥 미소가 흐른다.
가장 좋아하는 꽃은 작약이지만 나를 가장 닮은 꽃을 찾으라고 한다면?
동백꽃이다. 부산에 내려오기 전까지 살면서 동백꽃을 본 기억이 거의 없다. 부산에 내려오니 화단에도, 길가 가로수 옆, 동네 슈퍼 가는 길까지 곳곳에 강렬한 붉은색과 진녹색의 보색 대비를 볼 수 있다. 피는 시기도 11월 말부터 지금 3월까지 피어 있다. 같은 나무인데 피는 시기가 동네마다, 지역별로 조금씩 달랐다.
동백꽃을 보기 전에 꽃은 봄, 여름, 가을에 핀다고 생각했었다. 여기에선 나뭇잎도 모두 떨어진 겨울, 보란 듯이 화려한 동백꽃이 피어있었다. 작년을 기준으로 가장 늦게 핀 꽃이 동백꽃이라면, 올해를 기준으로 가장 먼저 핀 꽃도 동백꽃이다. 관점에 따라서, 시점에 따라서 다른 해석이 가능하다. 그래서 나는 동백꽃을 닮았다.
나는 아주 늦었다. 타인의 시선으로는. 얼마 전 모 자기 계발서의 저자가 나의 질문을 한심하게 답했던 것에 따르면. 내 또래 봉봉이도 미혼이라는 사실을 콕~집어 가리키며, 말했다. 너무 늦었다고~
하지만 어떤 의미에서 나는 아주 빠르다. 내가 지금 배우고 있는 연극, 참여하는 소모임은 모두 20대가 활동하는 공간이다. 내 또래의 사람들은 취미나 취향보다는 재테크나 육아 관련 모임에서 공부하고 만난다. 자기 계발서를 전 직원이 선물 받았지만 책에서 알려준 무크 사이트를 접속하고, 둘러보고, 결국은 수업을 이수한 1인이다(물론 내 주변의 소수 기준^^::). 내 또래는 아무도 하지 않는 것을 하니, 엉뚱하지만 가장 빠른 사람이다. 내가 피아노를 시작하니 나중에 입사 동기도 시작했던 것처럼.
관점에 따라서 나는 아주 늦은 사람도, 아주 빠른 사람에도 해당된다. 나를 알아가는 시도는 늦어도 너무 늦었고, 20대가 좋아하는 30살 유튜버의 멘털 관리 영상에 깊이 공감하는...(잠자기 전에 듣는다). 또래의 사람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 그렇다고 흔히 말하는 hip 한 감성을 가졌다거나 유행에 민감한 편도 아니다. 어디에도 끼기 어려운 불청객 같은 존재가 아닐까 하는 마음에 위축되기도 여러 번이었다.
내가 왜 이렇게 주변과 다른지 나에게 물어봤다. 나는 왜 나보다 10살은 크리에이터의 말에 더 힘이 나지? 예전엔 나보다 나이가 위인 사람들에게 상담도 많이 하고, 의지했는데 지금은 너무 다른데? 왜 요새는 나이가 위인 사람들에게 예전만큼 공감하지 못하지?
좋은 분들도 있지만 내 또래나 윗 세대의 사람들은 흔히 말하는 스펙에 훨씬 더 집중했다. 스케치북이라는 사람보다는 결혼 여부, 집 주소, 자산, 승진 여부로 나를 평가한다. 그리고 그 결과... 나는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나이가 아래 거나 새로운 장소에서 만난 사람들은 나의 개성에 신기해한다. 취미, 취향, 새로운 것을 시작해보는 것, 나이 또래와 전혀 다른 말과 행동을 재밌어했다. 그렇다고 딱히 레슨이나 아카데미 시간 외에 사적 만남이나 특별한 대화를 길게 하지는 않는다. 명확한 선과 경계. 이런 게 20대의 특성일까? 여하튼 서로가 쿨하게, 각자의 세계에 집중한다.
어제는 다음 주 공연을 할 의상을 골랐다. 배우면서도 실감을 못했는데, 의상을 보니 신기했다. 집에 가는 길에도 늦은 시간 피곤함보다 이름 모를 상쾌함이 느껴졌다.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늘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더 많이 생각했고, 어떤 날은 아침 꿈에도 등장했다. 그런데 올해는 좀 달랐다. 분명 나이가 한 살 더 먹고 더 우울해지지 않을까 했던 예상은 기우였다.
논란이 있었지만 설민석 선생님의 강의 듣는 것을 좋아한다. 누군가는 역사를 정통으로 공부한 사람이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 점이 설쌤의 강력한 무기이고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말도 연극톤으로 배우가 대사를 하듯 전할 때, 잠깐을 들어도 사람의 마음을 움직인다. 그리고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점을 떠올리게 된다.
목소리와 콘텐츠 구성은 마치 내가 전쟁터 한복판에 선 장군이 되었다가, 민초가 되었다가~나를 영화 속 한 장면으로 끌어들인다. 내가 연극을 배우는 가장 큰 모티브 역시, 내가 좋아하는 배우와 역사 선생님은 모두 연극을 배운 사람이었다. 바위 같은 단단한 마음을 구름처럼 움직이는 에너지를 사랑한다. 아직 연극 초보라 아무것도 모르지만 언젠가는 같은 메시지도 생동감 있고 따뜻하게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
주말에는 원데이 드로잉 클래스에 간다. 한 주, 한 주 새로움, 기쁨을 더해가고 있다. 꽃마다 피는 계절이 서로 다르듯, 내가 꽃피는 시기도 타인과 다르다. 아직 봉우리 단계이지만 꽃이 필 날이 가까이 올 것 같다. 다양한 재능과 매력을 차곡차곡 쌓아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