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림보

행복의 조건

by 그럼에도

요새는 저녁 시간이면 가을바람이 느껴진다. 태풍이 다가오는 지금은 더 차갑게 느껴진다.


보름 전에는 저녁 시간에도 열기가 느껴졌다. 에어컨이 없는 집이지만 강바람이 강하게 부는 집이어서 제법 딜만 했건만, 어린 초등학생 두 명의 열기는 강바람으로 식혀지지 않았다.


처음으로 놀러 온 조카들에게 맛있는 저녁 식사를 해주겠다며 근 한 시간을 불 앞에 서 있었다. 불고기, 전복찜, 야채 반찬 등으로 평소와는 전혀 다른 식단을 제공했건만... 아이들은 먹는 둥, 마는 둥이었다. 햄을 좋아하는 아이들의 입맛을 알지만 애써 건강한 식단을 차렸는데, 실망을 넘어서 화가 났다.


평소보다 목소리가 커졌고,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다음 날에도 마찬가지였다.


무더운 날씨는 이성을 녹여버렸다. 에어컨 아래에서는 쿨하고, 이성적인 태도를 보였지만 무더위에 불 앞에서 이리저리 움직인 나는 본능에 충실한 '화 많은 이모'였다. 아이들이 해달라고 한 것도 아닌 내가 원해서, 내가 대접하고 싶어서 했던 행동이었다. 난 왜 이렇게 화가 난 것일까?


동상이몽!


아이들이 바라는 것은 평소 식단이었다. 조카들은 아침엔 우유와 콘프라이트, 저녁엔 햄과 김으로 가볍게 식사를 하는데 나의 식단은 뭔가 부담스럽고 평소와는 달랐다. 나는 먹는 것을 너무나 사랑하며 식재료 하나하나도 원산지를 따지는 극성스러움을 갖고 있다. 하지만 조카들의 엄마인 나의 동생, 둘째는 먹는 것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나와는 달리 소식하고, 식단 역시 간단한 재료를 선호했다. 한식만 추구하는 나와는 정반대로.


나는 언제 가장 행복감을 느꼈는지를 생각해보았다. 승진을 하거나 연봉 인상, 원하는 물건을 샀을 때에도 기뻤지만 행복하다는 표현을 할 정도는 아니었다. 내 마음이 가장 뿌듯함을 느꼈을 때, 즉 행복함을 느꼈던 기억을 떠올려 보았다. 예전 가족여행으로 갔던 제주도에서 온 가족이 바비큐를 먹고 놀다가 잠든 모습이었다.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좋은 기분으로 잠든 모습을 바라봤을 때, 여행 준비와 운전으로 쌓인 피로가 순식간에 녹아버리는 느낌이었다.


행복을 나를 기준으로 바라보았다. 내가 어린 조카들에게 약간의 배신감까지 느꼈던 진짜 이유는 나와는 다른 행복의 기준이었다. 아이들이 생각하는 행복의 기준이 달랐고, 동생의 기준이 달랐다. 단순히 더운 날씨에 음식을 만들었다는 것이 목소리가 커진 이유는 아니었던 것이다.


세상을 내 기준으로 본다고 하지만 나의 행복의 조건을 다른 사람에게 강요했던 것이다. 또한 나의 정성을 인정해달라는 인정의 욕구까지 더해졌다. 나다워질 때와 누군가와 함께할 때는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 함께한다는 것은 적당한 거리 두기만큼이나 상대를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한데, 사랑하는 조카들의 마음을 온전히 받아들이지는 않았던 것이다.


어쩌면 늘 어려운 인간관계도 이렇지 않을까? 나의 마음만큼 타인의 마음과 관심을 바라왔던 것이 아닐까? 내가 준만큼 돌려받으려 한 건 아니었을까? 시간이 지나서 가을바람이 불고 나서야 이해되지 않았던 감정 한 올이 떠올랐다.


사랑하는 조카들에게 좋은 이모가 되기 어려웠던 만큼 언제나 나의 인간관계는 어렵고 서투르다. 그렇지만 한 걸음씩 용기를 내고, 내 감정이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지를 들어보려고 애쓰기로 했다. 감정에 언어를 붙여주기로 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딱 아는 만큼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