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림보

남일이니까

by 그럼에도

오늘,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노조위원장님이 노조 집행부로 들어오라는 요청이었다. 당황스러웠다. 노조에 가입한 시간으로 보아도 막내이고, 거기다 지금 내가 집 문제로 골머리를 썩고 있다는 걸 회사에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제가 지금 집 문제로 정신이 없네요. 저는 할 수 없습니다"


"집 문제는 들었고~ 그건 금방 해결되겠지."


다시 한번 거절 의사를 전하고, 전화는 곧 끊어졌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제정신이 돌아왔다. 나에게 이런 요청이 왜 왔을까? 평소 사내에서 대인관계가 좋은 편이 아니라 그 반대의 사람이다. 거기다 리더십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노조 모임에 적극적으로 활동은커녕, 정해진 회의 시간에 겨우 참석, 가끔 건의 사항을 말한 것이 활동의 전부였다. 노조 집행부와도 개인적인 대화를 나눌 사이 역시 아니었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전화를 받고난 후에 기분은 좋지 않았다. 누군가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스케치 온은 매니저 직급의 사람들에게 '이용당하기 좋은 대상'이라고. '스케치온의 아이디어나 재능을 이용하기만 하고 위로 띄우지는 않는 존재'라는 말이 순간 떠올랐다. 왠지 노조에게도 같은 대상이 된 것만 같아서 기분이 좋지 않았다.


통화 상의 이야기처럼 금방 해결될 일이라면 좋겠지만 나의 집 문제는 해결의 여지가 보이지 않는다. 대수롭지 않은 한 마디지만 법률 상담까지 받고 있는 나에게 한가한 소리를 넘어서, 선 넘는 소리로 들렸다. 남의 속도 모르면서.


사람은 이기적이라고 하지만 실감하는 순간은 매번 씁쓸하다. 그분에게는 대의를 위해서 소를 희생하는 것을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나는... 나는 무엇인가? 누군가의 희생양이나 자양분이 될 생각은 없다. 그저 나로서 내 삶을 지탱하는 것도 이렇게 아등바등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좋게만 들리지 않는 시점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 문제, 다시 돌아갈 집의 리모델링, 인사이동 등등 내가 고민하고 생각해야 할 일이란 자잘한 것부터 큰 것까지 다양하다.


오늘 내가 한 일에 중에 가장 잘한 일은 거절한 것이다. 예전 같으면 싫은데도 말할 기회를 놓칠 수도 있었다. 어설픈 표현과 예의는 일을 망친다. 그렇게 많은 거절 못한 경험이 쌓여서 오늘의 '거절의 용기'를 만들어 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 발씩 나아가고 있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값비싼 액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