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에 글 쓰기 좋은 날이다.
한 시간 전, 집주인의 갑질을 제대로 당하고 말았다. 집을 보러 오는 사람이 몇 명 없었는데 어제 집을 보러 오셨던 분이 계약하기로 했다. 난 계약기간이 일 년이 남아있었고, 애타게 다음 세입자를 찾는 중이었다. 어제 집을 보러 오셨던 분이 오늘 계약하겠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 하루는 정말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그게 길지 않았다.
집주인이 연락이 되지 않는다고 했다. 집주인 계좌에 계약금을 보내야 하는데... 집주인이 잠수를 탔다.
일흔이 넘은 집주인은 신기한 사람이다. 본인이 필요할 때는 수시로 전화하고, 메시지도 20대 못지않게 빠른 속도로 확인하고, 답문을 주셨다. 대화를 할 때 보니 핸드폰도 수시로 확인하고, 바로바로 전화도 받으셨다. 본인이 얼마나 바쁜지를 언급했지만... 사실은 선택적으로 전화를 받는 사람인 건 알고 있었다.
집주인이 전화를 안 받는다고 했건만 그런 집주인이 나에게 전화를 주었다. 안방에 불량 도배의 흔적으로 찢어진 곳이 얼마나 심한지 직접 확인하겠다는 말씀과 함께.
황당했다. 집주인은 이미 올해 2월 나의 메시지로 집 상황을 알고 있었다. 깜빡하신 건가 해서 예전에 보냈던 메시지를 언급했더니,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도 다시 확인해보겠다고 했다.
저녁 6시 40분, 집주인에게 전화가 왔다. 동네 부동산을 돌아보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시세가 말도 안 되게 저렴하다고, 이번 기회에 집값을 올리겠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반문했다. '이 동네에서 인테리어를 한 번도 수리하지 않고 내놓은 집이 어디 있냐고?'(도배가 전부인 집)집수리가 된 집이라면 올려도 되지만 인테리어가 안된 집에 지금 월세는 당연한 거라고 답했다.
갑자기 집주인이 내 목소리가 안 들린다고 했다. 안 들린다면서 내 말이 잘 들리는 사람처럼 본인은 꼭 집세를 올리겠다며 주기도문처럼 반복해서 말했다. 집주인이 말한 시세는 인테리어가 잘된 집 시세랑 같았다.
망했다. 집주인이 말한 시세라면, 이 집은 꼬박 일 년 집을 비워놓고 월세를 물어주게 생겼다.
집주인은 지난주부터 나를 갖고 놀고 있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일흔이 넘으신, 엄마보다 연세가 많은 집주인, 까탈스럽긴 하지만 그래도 집주인이니까 예의를 갖췄다. 집 계약할 당시만 해도 웃으면서 '돈이 너무 없다'면서 낡은 인테리어 보수를 못하겠다고 하더니... 알고 보니 집 몇 채에, 상가에 월세 부자, 현금부자라는 이야기를 그 후에 부동산을 통해서 들었다. 있는 사람의 없는 척 연기였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나는 선택권이 없었다. 집도 고르고, 집주인도 고르고 싶다. 하지만 작년 이맘때는 마침 집이 없었다. 집 위치는 좋았지만 집 상태는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냥 저렴한 오피스텔에 일 년 임대로 들어갈 것을, 늦은 후회를 했다. 그렇지만 어떻게든 일을 해결해야 한다. 아쉬운 사람이 우물 판다고, 아쉬운 사람은 나다.
오늘 전화 통화로 집주인의 메서드 연기가 탄로 났다. 전화를 일부로 안 받으면서 동네 부동산을 수소문한 것도, 멀쩡히 들리는 전화도 안 들린다고 하는 것도... 마지막 통화에서 이런 말을 남겼다.
그건 세입자 사정이고! 난 이번 계약하면 2년간 월세를 못 올린다니까. 집값 10만 원 더 올릴 거야. 자꾸 이런 식으로 전화하면 다음부터 니 전화 안 받는다.
"지금 집주인이라고 이렇게 갑질하는 거냐"는 말이 내 입에서 흘러나왔다.
다급한 마음에 부동산을 찾았다. 부동산 사장님의 묘안은... 올린 월세의 일부를... 내가, 그러니까 다음 세입자의 비용을 부담하는 것이었다.
어이없었다. 어제 뉴스에서 '역전세'라는 단어를 처음 들어보았다. 요새 집값이 내리면서, 전세금도 내려가니까 집주인이 오히려 내려간 전세금만큼을 은행 이자로 환산해서 역으로 세입자에게 준다는 기사를 보았다. 집주인도 아닌 세입자인 내가 다음 세입자의 월세금 일부를 물어준다는... 이런 신박한 아이디어?!
그럼에도 나는 약자였다. 혹시나 부동산에서 연락이 올까 전화를 확인하고, 토요일에는 집 보러 올 사람을 위해 청소하고, 대기하고 있어야 했다. 부동산에 집 비번을 알려주기에는 여자 혼자 사는 집의 특성상 그럴 수 없었다.
거기다 집주인이 말한 말도 안 되는 월세로는 다음 세입자를 구하는 건 더 어려워졌다. 근처에 새로 지은 아파트도 세입자를 구하지 못해서 시세를 많이 낮췄다는 이야기를 들은지라... 낡은 인테리어의 이 집이 애물단지로 느껴졌다.
이 동네를 떠나는 게 아쉬운 마음도 있었다. 어제 산책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고, 나를 다독이고 있었다. 그런데 현실은 집주인의 갑질에 어찌하지 못하는 나였다. 이사 가기 전까지 평일 저녁은 강변 산책을 하겠다는 결심을 오늘을 지킬 수 없었다.
산책갈 시간에 브런치에 글을 쓴다. 나의 해우소. 쓴다고 달라질 현실은 아니지만.
어떤 좋은 일이 생기려고 나에게 이런 액땜이 찾아온 걸까? 이 동네에 마음 두지 말라고, 하늘에서 악당을 보낸 걸까?
부동산 소장님 말씀으론 집주인은 이 동네에서 소문난 악당이라... 집주인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 부동산이 있다는 그런 이야기까지 덤으로 들려주셨다. 일흔 넘은 부자 악당이라?
바로 전에 살던 집주인이 떠올랐다. 나보다 열 살 많은 집부자였다. 계약할 때와 이사 문제로 몇 번 만났지만 대화는 간결하고 우아했다. 아우라가 있었다. 개인적인 대화를 해보지 않았지만 분위기가 남달랐다. 내가 부자가 된다면 그때 집주인의 우아한 빛이 나던 그 모습이었으면 좋겠다.
흑백의 비교처럼, 지금 나는 일 년 전 집주인과 전혀 다른 부자를 마주 보고 있다. 오늘의 경험이 내 인생에 어떤 자산이 될까? 흑역사가 될까?
결국 나는 역전세처럼 오른 집세의 일부를 물어주기로 했다. 나의 보증금은 소중하니까. 다음 달부터 서울 발령인데, 내년까지 지금 집에 매일 수 없기에... 그렇게 나는 돈으로 시간을 사기로 했다. 집주인이 다시 전화를 받지 않고 잠수를 탄다고 했다.
난 이사 갈 수 있을까? 비싼 액땜을 하고 있다. 다가올 2023년을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