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자가 왔다. 집주인으로부터.
집주인의 문자를 받은 후부터 기분이 급 나빠졌다. 그동안 다독이면서 잠재웠던 화가 다시 치밀어 올랐다.
어제 욕실에서 천장에서 물이 한 방울씩 떨어지는 것을 보았다. 난 곧 이사를 할 테지만 혹시나 집 보러 온 사람들이 이 장면을 본다면...
집주인에게 바로 누수 문제를 문자를 보냈다. 역시나 무응답이었다.
지난번 다음 세입자를 구했을 때, 집주인은 이틀 가까이 연락 두절이 되었다가 도배 문제를 핑계로 집에 왔었고, 갑자기 집세를 올렸다. 당연히 다음 예비 세입자는 계약을 취소했다. 그때부터 집주인은 내 문자와 전화를 받지 않겠다고 셀프 선언했다. 이유 없음. 집주인 마음이었다.
나 역시 고의적으로 계약을 방해하고, 귀가 안 들린다는 메서드 연기를 펼친 사람에게 연락하고 싶지는 않았다. 집세를 올린 것보다 나이 많은 사람을 배려하는 마음을 이용하다니? 메서드 연기는 일분도 안되서 들켜버렸다. 하지만 갑질은 끝나지 않았다.
만약을 대비해서 문제가 될 사안은 참지 않고 바로바로 보고하기로 마음먹었기에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집주인은 그 어떤 말에도 답을 하지 않았었다.
오늘은 관리사무소가 방문했고, 누수의 원인은 위층이라는 것을 발견했다. 관리사무소 직원의 말과 천장을 동영상으로 찍어서 집주인에게 보냈다. 48초의 동영상을 보내자마자 장문의 문자가 왔다. 집주인은 70대이지만 딸뻘인 나보다 문자 타이핑이 빠르다. 누가 보면 딸이 대신 보냈을까 싶지만 집주인이 맞다. 그것도 이모티콘을 섞어서.
집주인이 비용을 내지 않아도 된다는 동영상에 세상 친절한 메시지가 왔다. 놀리는 걸까? 다음 계약을 적극적으로 방해했으면서, 저런 문자를 보내다니? 다음 계약도 고의로 방해한다면 내용 증명과 법적 절차를 밟으리라 ㅠㅠ
요새 부동산에도 손님이 없다. 몇 없는 손님을 겨우겨우 데려왔는데 손님을 내쫓은 것도, 부동산 2군데를 이간질하는 모습까지 목격했다. 거기다 조건에 안맞게 월세까지 올리니 집 보러 오는 사람도 뚝 끊겨버렸다.
누군가 돈 많고, 시간 많고, 인성 나쁜 사람이 70대가 된다면 딱 지금 집주인의 얼굴을 하고 있을 것 같다.
집주인의 본모습도 알게 되었다. 악명 높은 인성으로 동네에서 집주인 물건은 취급하지 않는 부동산이 있다는 얘기를 전해 듣게 되었다. 우리집 말고도 상가가 있다고 했는데 늘 시끄러웠던 것 같다. 이번 일로 부동산 두 군데가 약이 올랐으니, 세입자인 나에게 그 전의 만행까지 들려주었다.
지금 집은 낡은 인테리어지만 나에겐 아주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아름다운 일 년의 기억이 최근 한 달 동안의 일들로 흐려지는 것 같았다. 그렇게 부글부글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담배 냄새가 났다. 혹시 아래층에서 베란다에서 담배를 피우나???
방을 나와 보니, 원인은 나였다. 주전자에 물을 올려놓고 방에 들어가서 분노에 차 있었던 사이에... 주전자를 까맣게 태워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집주인을 향한 분노는 엄한 주전자를 새까맣게 태워 버렸다. 내 속도 새까맣게 타버렸다.
가족들도, 주변에서도 마음을 비우라고 했다. 정 안된다면 일 년 월세를 물어주면... 그래도 보증금을 돌려받는 거 아니냐고? 속 편한 소리라고 치부하면서 이런저런 방법을 강구했지만... 결과가 오히려 더 별로인 나를 위로하는 말들이었다.
할 만큼 다했기에 나 역시 마음을 포기했고, 이 집을 별장처럼 써야겠다는 큰 포부를 갖기도 했다. 적어도 오늘 집주인 문자를 수신하기 전까지는. 집주인에게서 온 문자가 얼마 전 있었던 일들을 다시 떠오르게 했다. 나는 분노의 그날로 돌아가 있었다.
새까만 주전자에 응급조치를 하고 집을 나섰다. 동네를 한 바뀌 돌다가 일 년 전 계약했던 옆동네 부동산을 찾아갔다. 마음 같아선 신세 한탄을 하고 싶었지만 부동산 소장님은 내 얼굴을 보자마자 상황이 안 좋다는 것을 아셨다. 인사도 하기 전에 주변 부동산에 매물 등록 전화를 하셨고 순식간에 5군데 부동산에 더 실리게 되었다.
감사 인사를 드렸고, 역시 복비는 두 배로 치르겠다는 약속과 이사 날짜를 말씀드리고 바로 나왔다. 집주인이 밉다고 어쩌겠는가. 목마른 사람이 우물을 판다고 급한 건 나밖에 없었다. 살면서 일등을 해본 적이 없는데, 제일 많은 부동산에 실린 집으로 일등을 한 것 같았다.
동네를 한 바퀴 걷고 마음은 좀 누그러졌지만 분노 후 우울했다. 남은 화를 풀기 위해 스케치북을 펼쳤다. 꽃이 예뻐서 그리는 게 아니라 그리는 동안 마음을 비우기 위해 그렸다. 꽃은 예뻐서, 그리기 좋아서, 그리고 꽃이라서 좋다.
원근법은 모르지만 비슷한 색을 찾아가면서 그렸다. 꽃병을 앞에 두고 50분간 아무 말없이 그렸다. 그리 고난 지금에서야 마음의 화가 완전히 녹아버렸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 나는 스스로 나를 돕기로 했다. 온 마음을 다해서, 할 수 있는 건 다해 보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