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림보

각자의 무게

by 그럼에도

" 난 애가 둘이고, 거기다 혼자 벌어."


언제나 주기도문처럼 외벌이 남편임을 강조하는 A의 단골 멘트다. 가장의 무게를 강조하는 그 의미는 알겠지만 A 외에도 팀 내에 외벌이 남편은 많았다. 단지 외벌이 가장의 무게를 강조하는 사람은 A 혼자였다.


그 소리가 유난히 거슬렸던 시기는 구조조정 시기였다. 싱글인 나에게 굳이 이런 이야기를 할 때는 특히나 불쾌했다. 4명의 가족이 400kg의 무게처럼 강조하는데, 싱글인 나는 뭐 날개 달린 천사처럼 가벼운 건가?


만약 내가 유부녀였다고 해도 여전히 불쾌했을 것이다. 아마도 '둘이 버니까, 네가 이런 시기에 그만두라'는 메시지로 들렸을 것 같다.


그런 A에게 인수인계를 하는 마지막 날이었다. 단 둘이 점심을 먹는데 또 가장으로서 무게감을 큰 목소리로 떠들기 시작했다. 이번엔 나의 인내심도 바닥을 드러냈다.


"저도 반려견 두 마리가 있고, 한 마리는 몇 백만 원의 수술비를 내야 했고, 집에 여기저기 문제가 생겨서 공사 비용에, 대출금도 갚아야 해요. 나라는 사람을 유지하는 것도 반려견과의 일상 유지도 다 돈이 들어요. 사람은 환경이 달라도 각자의 자기 인생의 무게가 있거든요. 그러니까 혼자만 힘들다고 그러지 말아요!"


몇 년을 잘 들었던 주기도문 같았던 A의 말에 처음으로 말대답을 했다. 평소 같았으면 집에 가는 길, 찜찜한 마음을 가누지 못하는 소심한 사람임에도, 그날은 달랐다. 속이 다 후련했다. 더 빨리 말해줄 걸 하는 생각도 들었다.


A는 그랬다. 소신 있는 척, 센 척하면서 말을 하지만 영악하게도 사람 봐가면서 그런 말을 던졌다. 본인보다 약하다고 생각하는 그런 사람에게는 특히나 그랬다.


한 집안의 가장이 아닐지라도 그 부담을 아예 모른다고 할 수 없다. 아빠는 다둥이 남매를 외벌이로 키우셨다. 그것도 직장인이 아닌 자영업으로. 가장의 무게와 부담을 눈으로 보고 자란 나였다. 지방에서 자영업의 들쭉날쭉한 수입이란...


A의 외벌이 멘트는 여직원에게 주로 하는 멘트였다. 여직원이래 봐야 마침 같은 팀 내에 몇 명 되지도 않는데... 특정 사람을 목표로 하는 것이 참 별로였다. 이번엔 무례한 사람에게 함부로 웃어주거나 조용히 넘어가지 않았다. 그렇게 버럭 하는 모습을 본 A는 바로 목소리를 낮췄다. 평소와 달라진 내 모습에 흠칫 놀라는 기색이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런 점이 좋다. 경험치가 생기고, 강단이 생긴다. 이렇게 말대꾸해도 특별한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것도 잘 알게 된다. 다만 행동하고 하지 않고의 차이일 뿐이다.


A는 나이를 먹어도 모르는 게 있다. 사람의 본성은 쉽게 변하지 않지만 태도는 쉽게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A와 업무로 전화 통화를 했다가 몇 달 전 그날이 떠올랐다. A는 여전했고, 나는 전보다 더 냉담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A는 통화 중간에 바로 끊어버렸다.


A는 여전히 모른다. 전에 들어주던 타인이 변한 것이 아니라 A가 속한 세상도 예전에 달라진 것을. 여하튼 조직 개편으로 A와 나는 다시 같은 소속이 되었다. 다행인 것은 팀은 달라서 마주칠 일은 그다지 없다는 것이 위안으로 삼을만했다.


무례한 사람에게는 냉담하게, 단호하게, 세상의 이치대로 대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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