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림보

그럼에도 갈 길은 가겠지

by 그럼에도

19살, 처음으로 혼자 서울에 올라왔다. 두 손에는 대학교 원서 봉투를 든 채, 지하철을 타고 학교가 있는 동네까지 도착했다.


지하철역에서 본 지도로는 금방 도착할 것 같았는데 막상 지하철 역을 나와보니 아파트 숲이 펼쳐졌다. 길치에게는 당황스러운 장면이었다. 그때 마침 나와 똑같은 원서 봉투를 들고 있는 모녀를 발견했다. 만반의 준비를 하고 온 나와는 반대로 가까운 곳에서 온 듯한 편안한 옷차림과 세련되어 보이는 헤어스타일에서 서울사람임을 짐작했다.


바로 다가갔다. 그리고 OO대학교에 가려면 어떻게 가야 하는지를 물어보았다. '나도 처음이라 모른다'라고 말했던 모녀는 길을 너무나 잘 아는 것처럼 갑자기 시야에서 사라졌다. 하는 수 없이 대로변에 있는 표지판을 따라서 걸어보았다. 지도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정문은 꽤 멀었다.


나중에 보니 원래 가려던 방향은 지하철역과 가까운 후문이었는데, 대로변 표지판을 보고 차도 방향으로 걷다 보니 정반대 방향인 정문으로 도착했다. 예상 시간보다 한참 더 걸렸지만 그럼에도 접수 시간 내에 무사히 도착했다. 원서를 내고 나오는 길, '서울 사람은 참 매정하구나'라는 씁쓸함을 느끼며, 추운 겨울에 걸어온 길을 다시 되돌아갔다.


얼마 전, B에게 연락을 했다. 마침 OO자리에 사람이 비어서 구인 공고를 보았기 때문이다. B는 마침 공고가 났던 팀에 근무 중이었다. 친한다고 말하기는 어렵지만 우리는 일 년에 한두 번은 연락하는 사이였다. 예전 우연한 인연으로 시작된 사이, 필요한 일이 있거나 또는 B가 심심할 때 전화가 오고 갔다.


그런 B도 알았을 것이다. 지금 내가 전화한 이유를. B에게 전화를 걸자마자 바로 발신음이 끊겼다. 매사 치밀하고 꼼꼼한 B였다. 마침 급한 일이 있어서 전화를 끊었다면, 다음에 곧바로 전화를 주었을 사람이었다. B의 장점은 한 치의 오차가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혹시나 같은 팀에 근무할까 봐 그러는 걸까. 아니면 팀 안의 정보를 주는 게 부담스러웠을까.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원서를 내기 위해 용기를 내는 것도, 접수하는 것도 어려운 일은 아니다. 가는 길을 알려주지 않아도 지금은 사이트에 접속해서 제출 버튼을 누르는 시대니까.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갈 길을 갈 테니까.


누군가의 도움은 속도를 높여줄 뿐, 방향을 바꿀 수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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