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살, 영어에 재미를 붙였다. 제일 좋아하는 과목은 역사와 영어였다. 수학, 과학 빼고 암기과목만 배운다면 얼마나 재밌을까? 좋아하는 과목만 공부하는 그런 날이 오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런 날이 왔다. 대학생이 되었다. 원하는 과목만 골라 듣는 행운이 생겼다. 하지만 공부가 재미없었졌다. 어렸을 때는 원하는 과목만 배우고 싶었는데, 성인이 된 나는 변해버렸다.
영어는 오래 쉬다가 취업 직전에 토익을 시작했다. 간신히 점수를 올리고 다시 영어와 이별했다. 그것도 아주 오래오래. 일 년에 한두 번 영어 책을 사긴 했지만 몇 장 읽어보지도 않고, 헌 책방으로 보내졌다.
떨어진 시간만큼 영어와 사이가 나빠졌다. 헤어진 기간이 길어서인지 더 낯설고 완전히 자신감이 없어졌다. 이젠 울렁증이 생긴 것 같았다.
그러다 작년엔 영어 인강을 결제했다. 큰맘 먹고 시작했는데 일 년 동안 20일을 수강하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다시는 영어에 돈 쓰지 않겠다고 결심했다. 그렇게 영영 영어와 담쌓고 살 것 같았다.
그런데 다시 영어를 시작하기로 지난주 금요일 마음먹었다. 영어를 못하니, 부서 이동이 힘들 수밖에 없었다. 이미 늦었고, 너무 늦었지만 뭐 어쩔 수 없었다. 급한 마음에 EBS 영어 교재를 샀고, 하루에 한쪽씩 외우고 있다. 어렸을 때 나의 주특기가 암기였건만 오랜만에 하는 암기라서 입도, 머리도 굳어버렸다.
브런치를 처음 시작했던 날처럼 영어 암기가 낯설다. 너무 늦었다고 포기하고 싶을 때마다 듣는 노래가 있다. 이승환의 '30년'이라는 노래를 듣는다. 30년 후의 내가 지금 나를 본다면 어떤 마음일까? 그때도 충분히 젊다고 30년 후의 내가 말하고 있겠지.
작년 연극 수업 3분기에 한 69세 어머님이 참여하셨다. 공연 날, 밝은 색 옷을 곱게 입으시고, 맡은 배역의 대사를 단어 하나 틀리지 않고 연기하셨다. 민망했다. 대강 대사를 외운 나와는 차이가 있었고, 대본을 그냥 보고 읽는 20대들과는 확연히 비교가 됐다. 가장 열정적이셨고, 가장 완벽했다.
너무 늦어도 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더 잘할 수도 있었다. 이미 늦었지만 하고 안 하고는 결국 차이가 날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