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유튜브에 짧은 영상이 추천으로 올라왔다. 일타 현우진선생님이 학창시절, 독서실에서 만난 형에 대한 이야기 영상이었다.
듣고 나서 공부에 대한 생각보다 고2 때 만났던 독서실 고3 언니가 떠올랐다. 작은 체구의 언니는 웅크린 자세로 밤 12시까지 공부했다. 책상 앞에서 졸면서 딴짓하는 나와는 정반대였다. 나는 그때도 목표는 없었다. 다만 수능 시험을 잘 본다라는 모호한 언어가 전부였다. 반대로 언니의 목표는 법대에 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반년 후에 모 대학 법학과에 입학했다.
갑자기 생각난 언니 이름을 포탈에 검색해 보았다. 바로 OOO변호사로 언니 기사가 나왔다. 미국 변호사로서 현재 모기업의 수석변호사로 활동 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역시 언니는 꿈을 이루었구나. 입가에 미소가 감돌았다. 외모 역시 어렸을 때 얼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자기 분야에서 '수석' 타이틀을 달고 웃고 있는 사진 속 언니를 계절로 따지면 가을이 떠올랐다. 환한 미소와 스펙은 수확 직전의 풍성한 가을 느낌이 묻어 났다.
그런 언니를 바라보는 나를 계절로 따지면 차가운 초봄이 떠올랐다. 나는 2월 차가운 날씨 속에서 잎사귀 한 장 나오지 않은 앙상한 가지의 나무였다. 심지어 내가 사과나무인지, 앵두나무인지 알 수 없는 정체불명의 나무.
지난주 봤던 직무 면접 결과는 탈락이었다. 필요한 사항 중 한 가지가 부족하다는 피드백을 받았다. 전과는 팀 상황이 달라져서 가능성 대신 지금 당장 업무에 투입할 사람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런 결과와는 달리 면접 분위기는 훈훈했다. 그저 '나만의 성과'라고 생각했던 것들을 이력서에 적었고, 관련 내용을 이야기했더니 전략적인 사람이라는 피드백을 받았다. 면접관은 작년에 기회가 왔을 때, 지원하지 않고 왜 지금에서야 지원하는지를 물으면서 아쉬워했다.
바로 그것이었다. 나의 아킬레스건. '변화'에 관련된 자기 계발서만 읽을 뿐, 좀처럼 자리를 벗어나지 못하는 그런 뫼비우스의 띠를 걷고 있는 사람이. 작년 변화의 시기에서도 나는 현실에 안주하기로 했다. '안정'이라는 달콤함이 컸고, 스스로 생계를 부양하는 1인 가정이라는 '자기 합리화'로 포장했었다.
고해성사하듯 현실에 오랜 시간 안주한 것이 가장 큰 단점임을 고백했다. 그래서 늦은 시기임에도 지원했다고. 내가 만든 단점을 내 손으로 고치기 위해서 면접을 보았다고. 면접에는 탈락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나만의 성과'라고 명명했던 프로젝트가 대외적으로 인정을 받았고, 재능이 있다고 평가받았기에 '탈락 겸 인정'의 자리였다.
나는 OO언니처럼 어린 시절도, 지금도 목표가 없었다. 더 정확히는 뭘 원하는지, 뭘 잘하는 지를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그렇게 이도 저도 아닌 시간을 살았다. 3년 전 부산에 간 건 타의였다. 하지만 그때부터 자의로 새로운 시간을 살았다.
앱 계발, 유료 인강, 스피치 수업, 방통대도 다녀보고, 연극수업, 피아노, 글쓰기 수업도 들어보았다. 나중엔 그림수업도 몇 번 들어보면서 내가 알지 못하는 나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한계는 있었다. 자기 계발만으로도 너무나 부족했다.
올해는 25세 입사 이후로 처음 다른 직무에 도전했다. 결과는 떨어졌지만 퇴근 후 자기 계발을 벗어난 업무 전환으로 나를 알아보는 도전이었다. 취미 외에도 내가 어떤 일에 맞는 사람인지를 깨달을 차례다. 30살의 고민과 방황을 유기한 대가로 나는 40살이 넘어서 못다 한 숙제를 풀고 있었다.
사람들은 40살부터 어떤 일에 결과를 맺는다고 기대한다. 물론 내 주변에도 임원이 되었거나 스타트업을 창업하는 멋진 사람들이 있다. 반대로 나처럼 망부석이 되어 한 자리에 고정된 사람도 있고. 이금희아나운서가 말한 '이제부터 꽤 괜찮아질 나이'가 되었다. 그래서 괜찮을 시도와 시행착오를 겪어보기로 했다.
어차피 나는 직선으로 달리는 레이서가 아니라 곡선과 험난한 산을 오르는 등산가가 될 테니까.
누군가가 가을을 기다릴 때, 나는 떡잎을 준비하는 봄을 기다린다. 몇 년간 멈춰있다가 어느 날 갑자기 쑥 커져버린다는 '모소대나무'처럼, 응축된 힘이 올라올 시기를 기다린다. 정확히 그 시기와 방향을 찾고 있다.
그럼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장은 이루어지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