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쟁을 벌이던 동생이 드디어 독립을 선언하고 이사를 가던 날.
고구마 같은 마음이 사이다처럼 시원해지기는커녕 눈에 눈물이 고이던 그런 날이었다. 미운 정과 고운 정이 감돌아서인지, 반려견이 이사를 방해하고 뒤돌아서서 이사 가는 누나를 하염없이 바라봐서인지... 마음이 뒤엉킨 날이었다.
그런 날, 아침 일찍 남자친구의 전화가 왔다. 어머니가 잠시 보자는 말씀과 함께. 미룰 수 있다면 미루고 싶었지만 어르신의 '마지막'이라는 말씀에 순응했다.
역시나 '마지막'이라는 말은 그냥 하신 말씀이었다. 예로부터 '사주' 나쁜 사람이 만나서 잘 사는 집안에 없음을 동네사람부터 집안을 거슬러 딱 2명이 있었다. 그래서 안 되는 것이었다. 나쁜 꿈을 꾸었고, 사주가 나쁘니 너희 둘은 안될 사이였다. 다만 결코 '반대'는 아니다. 사주가 나빠서다.
주변에 존경하는 지인도 인생의 중요한 결정은 '사주'를 본다고 했다. 사주집에서 좋은 말을 하는 것은 무시하고, 나쁜 말만 기억하고 조심하면 된다는 조언을 들었다고 했다. 내가 보기에 어머니는 사주보다 '존경하는 지인'의 말씀을 숭배한다는 인상이었다.
사주가 인생의 모든 것을 결정짓고, 인생이 '사주'에 적힌 대로만 풀린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노력은 해서 뭐 하나? 어차피 사주 좋은 사람만 잘 풀리고, 나쁜 사람은 노력해 봤자 잘못될 텐데. 이런 마음을 속으로만 되뇌다가 집에 돌아왔다.
그렇게 나는 오전에는 동생과의 이별로 헛헛함을, 저녁에는 사주라는 초자연적인 힘을 빌린 분노와 절망감을 들으며 집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아주 오랜 시간 잠들었다. 깨어나서 갖게 되는 온갖 생각대신 잠으로 잊고 싶었던가 보다.
토요일 하루는 너무나 길어서 일요일의 짧은 시간만을 남겨두었다. 나는 어디로 흘러가는 것일까? 인생에는 그렇게 정해진 시간표와 길이 있는 걸까? 사주에는 다 적혀있다는 데, 당사자인 나는 미래는 궁금하지만 사주에는 관심이 없다.
어차피 사주를 말하는 사람이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것도 아니고 말이 틀렸다고 피해보상을 할 사람도 아니니까. 그들은 돈을 위해서 사주를 말한다.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마라맛처럼 독한 맛은 순한 맛보다 인기 있으니까.
그들이 뭐라 해도 내 인생은 내가 사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