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통의 전화가 와있었다.
이름을 보는 순간, 심장이 빨라졌다. 이건 좋아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빨라지는 심장 박동이 아니었다. 위험을 감지했을 때, 동물적으로 빨라지는 심장 박동이었다.
회사 사람인 A였다. A는 사람 좋은 이미지였고, 개인적인 대화는 없었지만 인수인계로 며칠간 대화는 해 본 사이였다. 그런 A는 몇 달 전부터 나의 심장을 빨리 뛰게 만들었다.
[ 1차 ]
시작은 7월 중순이었다.
A가 업무 문제로 도움을 요청했다. 쉽게 들어주었다가 함정에 빠질 뻔(?) 했다. 거래처 일정을 알아보는 간단한 업무 협조였다. 그런데 그날 오후 알았다. 생색은 본인이 내고, 내게 서류 업무와 행사 진행까지 떠 넘기려는 A의 큰 그림이었다는 것을.
너무 놀라고 흥분돼서 한 시간가량 널뛰는 마음을 다독인 후에 '나는 할 수 없음'을 강하게 표현했다.
나의 반격은 사람 좋다던 A의 목소리 톤을 올려버렸다.
A의 계산에는 나라는 순두부멘털은 이 정도면 쉽게 걸려들 줄 알았던 것이다. 게다가 위에 이 상황을 보고했다니. A의 계산에 나의 행동은 예상 밖이었다.
며칠 후 A는 다시 연락을 했다. 이 행사는 '그럼에도'너와 관련된 OO항목이 많다고 묻지도 않았는데 알려주었다. 마음 약한 내가 쉽게 넘어가던 '일종의 업무적인 죄책감'을 자극하는 이야기였다.
내가 왜 미안해하고 죄책감을 가져야 하지?
신입사원부터 꽤 오랜 시간 나의 소심함과 지나친 죄책감은 남 일 대신하고 귀찮은 모든 것을 떠맡은 일등공신이었다. 그랬음에도 오랜 시간 그런 악순환 속에 살고 있었지만.
[ 2차 ]
사흘이 지나서 연락이 왔다. 묻지도 않았고 궁금하지도 않은데 말을 걸었다. 이 행사는 다른 부서가 할 수도 있고, 본인이(?) 할 수도 있다고 했다.
'본인이 할 수도 있는데 몇 번이나 끈질기게 말 거는 수고는 왜 하는 걸까?' A의 말에는 논리가 없었다.
그리고 내가 속한 팀, 팀장에게는 허위 보고를 했다 것도 전해 들었다. 사실을 다 아는 사람이 두리뭉실하게 설명해 놓고는 나의 근무 태만처럼 상황을 몰아가고 있었다.
이에 지지 않고 나 역시 나의 팀장에게 현 상황을 짧게 보고 드렸다.
나의 근무 태만이 아니고 '이 행사는 회사 지침에 어긋난다'는 경고와 함께.
모든 것을 다 아는 A의 큰 그림이었다. 위험한 행사의 법적 책임을 나에게 돌리는 것, 나에게 묻지도 않고 진행시키면서 자꾸만 끌어들이려는 그 이유는 말하지 않아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늘 조용히 웃던 A와 그 옆에서 웃던 A의 팀장 B는 나와 오랜 시간 같은 소속(계열 팀)이었다. 한 마디로 잘 아는 사람, 순두부 영혼의 나에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우려 했다. 그렇게 끌어내리려 했던 것이었다.
[3차]
8월 중순, A의 극도로 공손한 메시지가 날아왔다. 휴가는 다녀오셨는지...라고 시작하는 메시지였다.
A는 연차는 비슷하지만 나이로는 훨씬 위인 사람이었다. 메시지의 공손함이 도를 넘어섰다. 일흔이 넘은 사람이 받을 법한 극존칭을 쓰면서 시작한 메시지의 내용은 이랬다.
'지난번 행사의 진행 건을 궁금해할 것 같아서 전달한다'라는 것이었다.
분명 몇 번이나 거절했던 일의 진행 상황을 왜 나에게 보고하는 걸까? 안 물었고,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였다.
'저는 곧 휴가이고, A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다른 부서에서 상신하시길 바랍니다. 저도 그 행사가 진행되는 시기에는 다른 업무로 바쁜 가을이 되겠네요. 건강 유의하세요'라고 아주 공손하게 답변했다.
마음 같아서는 '저랑 관련 없으니 이런 메시지 다시는 보내지 마세요'라고 하고 싶었지만 꾹꾹~참고 영혼 없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나를 지속적으로 자극한 A의 제안을 무사히 거절했다고 생각했다.
[4차]
9월이 되었다.
어제 다시 A의 부재중 전화가 와있었다. (지금은 서류 상신의 시기였다)
부재중 전화에 전화를 걸었더니 A는 공손히 인사 후 물었다. '그럼에도 님의 담당 고객이 이렇게 많이 참석하는데 정말 서류 상신을 하지 않겠냐?'는 최종 질문을 하고 있었다. 더하여 'OO이라는 높은 분이 이 일은 그럼에도 님과 상의해 보라고 했다'는 말도 함께였다.
여기에도 나의 대답은 'NO'였다. 거기다 같은 날, 나는 다른 업무가 있었다. 미리 일 벌여놓은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A는 그동안 내가 한 번도 거절하지 않았던 사람인 것처럼 지속적으로 웃으면서 다가왔다. 자기 계발서나 영상에서 말한 것처럼 단호하게 몇 번을 말해도 끈질기게 다가왔다.
A의 패턴은 그랬다.
1차는 마케팅 용어인 '문간에 발 들여놓기' 같았다. 작은 요구를 들어주면, 다음에 큰 요구도 들어준다는 사람의 심리를 이용하려고 했다. 그리고 그게 잘 되지 않으니, '상황'을 설명했다. '너의 고객이 많다, 그리고 이건 아주 중요하다'라며 순두부 멘털을 흔들었다.
마치 내가 업무 열정이 부족해서, 일을 하지 않는 것처럼 말했다. 거기다 실제 행사와는 다른 정보를 흘리면서 말했다. 다 알면서도 뭉뚱그려 말하는 A의 센스에 당황했다.
2차는 지속적으로 이 일에 관심을 갖도록 했다. 그렇게 관심 끄고 싶어서 이야기가 나왔던 주에 모두 끝낸 일이었다. 한 달이나 지나서 다시 말을 걸었다.
3차는 권위를 이용했다. 내가 거절하기 힘든 'OO의 말'을 빌려서 말했다. '그럼에도 님과 잘 상의해 보라고 OO님이 말씀하셨다'라면서. 영향력이 상당한 OO님의 말씀을 쉽게 거절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아는 영악한 A였다.
A의 큰 그림을 벗어나기는 했지만 앞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 있을 것이다. 오랜 시간 사내에 잘 알려진 나의 순두부멘털, 일 욕심은 A와 같은 악당에게 이용하기 좋은 포인트가 된다는 것이다.
이런 나의 두부멘털과 A의 지속적인 움직임에는 어떤 패턴이 있다. A에게 맞설 힘은 단순히 용기에서 나오지 않는다. 이런 거절이 나에 대한 험담과 함께 말 지어내기 좋은 사람들의 술안주거리가 된다는 것도 알고 있다.
좋은 사람(?)의 이미지, 적당한(?) 사내 인간관계를 자를 마음이 필요하다. 아무리 내가 당당하다고 하여도 사내 네트워킹이 잘되는 사람을 건드린(?) 것에는 나름의 뒷감당할 자잘한 에피소드가 생긴다.
그럼에도 더 중요한 것은 지켜야 할 '나라는 사람'이다. 더하여 업무 지침을 벗어난 열정은 언제나 화를 부른다. 성공과는 담쌓았지만 오랜 세월 근무한 이력이 알려준 메시지는 그랬다.
'네 놈들이 나를 욕한다고 해도 나는 훼손되지 않을 것이며 너희들이 나를 칭찬한다고 해도 나는 거룩해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그저 나로 살겠다'라는 내용의 김훈작가님 인터뷰 말씀을 되뇌인다.
성공하지 못했어도 나는 그저 나로 살련다. 너희들의 그런 큰 그림에 나는 포함되지 않을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