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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Sep 17. 2023

짜고 치는 고스톱

 지하철에 탔다가 깜빡 잠이 들어버렸다. 눈을 떠보니, 낯선 분위기의 역이 보였다. 신당에서 왕십리를 향해 가고 있었는데 눈을 뜬 장소는 사당역이었다. 황급히 내렸다. 그리고 핸드폰을 열어보니 밤 10시 40분이었다.


 그런데 집주인의 문자가 와 있었다.

 사건은 이랬다.


 며칠 전 수요일에 집주인의 전화가 왔다. 집주인은 평소 어떤 연락에도 답을 하거나 전화도 받지 않았다. 연락두절이던 집주인이 먼저 연락이 온 다음에는 늘 사건이 발생했다.


 이번에 집주인은 갑자스러운 부재중 전화와 함께 문자'집이 나가도록 서로(?) 노력해 보자'라는 내용의 문자도 보냈다. 구해놓은 세입자도 쫓아냈던 집주인이었다. 계약기간 종료 보름이 남았는데 집이 계속 비어 있고 보러 오는 사람도 없으니 태도가 돌변했다.


 집주인의 전화 후, 부산집 CCTV를 돌려봤다. CCTV가 꺼져 있었다. 집에 누군가가 들어오면 자동으로 알람이 떴다. 몇 달간 알람이 뜨지 않아서 집 보러 온 사람이 없는 줄 알았다.


 주말에 내려가려고 보니, 철도 파업이라는 안내문이 떴다. 부산에 가는 표는 있지만 올라오는 표가 없었다. 급한 마음에 부산에 사는 지인에게 어려운 부탁을 드렸다. 다행히 지인이 집에 가서 CCTV를 켜고, 현관문 비밀번호를 변경해 주셨다.


 비밀번호를 바꾼 지 하루 만에 S부동산에서 전화가 왔다. 12시 44분이었다.


 부동산 소장님은 '집에 가봤는데 비번이 바뀌었네요'라고 말했다. 4월에 '전대차계약'을 운운하며 집주인과 마찰이 있던 부동산이었다. 찜찜했다. 하지만 집 보러 온 손님과 함께라고 하니 바로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문자를 보냈다. 어제 비밀번호를 변경하였고 지금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은 소장님  한 분이라고. 집비밀번호는 다른 곳에 공유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드렸다.


 집 비밀번호를 알려주고 여섯 시간이 지났다. 이번에도 CCTV 알람이 울리지 않았다. 이상했다. 또 CCTV 문제가 있는 건지 궁금했다. S부동산에  '소장님~몇 시쯤 집에 오셨나요?'라고 문자를 보냈다.


 답이 없었다. 전화를 했더니 소장님은 오후 한 시반에 손님과 함께 방문했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다시 CCTV를 연결해 봐도 오늘 집에 온 사람은 없었다.


 잠시 후 부동산 소장님 전화가 왔다.


 "집 보러 가기는 했는데 손님이 너무 고층이고 어지럽다고 엘리베이터에서 그냥 가셨어요. 비밀번호까지 알려주셨는데 말하기 미안해서 손님이랑 보고 왔다고 말한 거예요. 지금 양심에 가책이 와서 전화했어요. 그리고 나만 비번 아는 건 부담되니 다시 비번 바꿔요."


S부동산 소장의 양심고백(?)도 그리고 비번을 바꾸라는 말, 오래된 아파트의 저속 엘리베이터에 어지럽다는 말까지. 모든 게 어색하고 남루했다.


 그렇게 오늘의 작은 이벤트가 끝났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밤 10시가 넘어서 집주인의 긴 문자가 왔다. 내가 비밀번호를 바꿔서 손님을 집을 보러 오지 않았다고. 그래서 제때 보증금을 돌려받을 수 없다는 내용의 억지가 시작되었다.


 오늘 일을 시간별로 다시 적어보니, 오늘 집에 온 사람은 집주인이었다. 비밀번호가 바뀌어서 안 열리니 S부동산에 가서 말했다. S부동산은 손님이 왔다고 말을 하며 나에게 비밀번호를 물어보았다. 그리고 집에 온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밤 열 시가 넘어서 집주인의 비밀번호 변경을 운운하는 문자가 왔다. 나는 늦은 시간임에도 집주인의 문자를 캡처해서 S부동산 소장에게 전송했다.

 




 상황을 이렇게 몰고 가면 세입자의 보증금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계략을 세운 것 같았다. 일흔이 넘은 건강하고, 돈 많고, 시간 많은 악당은 이렇게 활기를 띠었다. 누군가를 괴롭히거나 막말을 할 때, 빛나던 일흔 넘는 여자의 눈빛, 그건 집주인이었다.


 계약기간 동안 내 집의 비밀번호를 변경한 것이 세입자의 보증금을 주지 않아도 되는 이유가 될까?


 시간과 법은 누구의 편에 서게 될까?


 건강하고, 시간 많고, 돈 많은 악당은 지속적인 갑질을 할 수 있을까?


 오늘 부산은 호우경보가 내렸다.


 많은 비가 오던 밤, 집주인은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며칠 전, '집 문제로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라고 하더니 진심이었다.


 잠 못자고 고민해서 내린 결론이 부동산과 협력해서 일을 만드는 것이었다.


 23년 9월 30일은 임대차계약 만료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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