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느림보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그럼에도 Oct 04. 2023

악마는 할머니의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내가 돈 안줄 사람으로 보이냐? 돈 보내줄테니, 방정맞게 굴지마라"

  나의 부산행은 끝나지 않았다.


 돌아온 지 일 년이 다 돼 가고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임대차계약이 만료되었다. 추석 연휴가 겹쳐서 늦게 송금할까봐 마음이 조급했다. 그럼에도 하루를 참았다가 10월 2일에 전화를 드렸다.


"은행이 문 열면 농협에서 대출받아서 돈 보내줄 테니까, 다시는 전화하지 마라"


 집주인이 웬 일로 쿨하게 큰소리를 쳤다. 믿고 있었다. 그날이 오늘이었다. 10월 4일, 은행 영업일.


 오늘은 아침 일찍 눈이 떠지고 하루종일 심장이 두근거렸다. 이건 핫식스 같은 에너지음료를 마셨을 때, 보였던 나의 심장 반응이었다. 뭔가 싸한 기분이 오전 내내 감돌았다.


 집주인이 말한 부산의 한 지역농협에 대출 업무로 '송 oo'님이 왔는지 전화를 해보았다. 친절하게도 오늘 대출 업무로 다년간 적도 없고, 지금 대출 신청을 해도 송금받으려면 일주일은 걸린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결국 집주인이 오늘 대출받아서 준다는 말 자체도 거짓말이었다.


 오후 두 시가 넘어서 집주인에게 전화를 걸어보았다. 집주인은 '지금 나를 못 믿어서 농협에도 전화해 본 거냐며, 화를 냈다. 어쩌면 사람이 그렇게 방정맞아?'라고 하면서 큰소리 쳤다.


 순간 내가 너무 섣부른 행동을 한 건가 하는 생각을 했다. 집주인이 그동안 거짓말을 너무 많이 해서 그 모든 말에 불신이 너무 심했던 걸까?


 하지만 정말 잘못된 생각이었다. 두 시간쯤 지나서 관리사무소에서 전화가 왔다. 바쁘다던 집주인은 엄한  관리사무소 경리 직원을 찾아가서 '장기수선충당금' 내역을 묻고, 새로운 형식의 계산서를 만들라고 행패를 부리고 갔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형식적으로나마 문자로 집주인이 원하는 메시지를 다시 보내겠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은행 영업시간이 끝나가는데 송금 대신  ‘관리사무소에서 행패'를 부린 집주인이었다. 결론은 돈 줄 마음도 없었다. 집주인은 작년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집주인의 거짓말은 모두 합법적이었다. 계약기간이 만료된 지금부터는 불법이 된다.


 은행 영업시간이 끝나고, 집주인의 전화가 왔다. 내일 만나서 얼굴 보고, 계약서를 돌려받는 조건으로 돈을 주겠다는 것이다. 거기다 관리사무소에도 다시 한번 같이 가자는 조건이었다.


 바라던 돈이 들어온다는 말에 집주인이 원하는 시간에 승낙을 했다. 하지만 이상했다. 통화 중에도 계약기간 만료와 부동산 계약서 교환이라는 조건은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집주인말은 이게 다 OO부동산에서 그렇게 말했다고 했다. 검색해 보니 'OO’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집주인이 종종 가는 H부동산에 연락해 보니, 집주인과 오늘 연락을 주고받은 일이 없다고 말했다.


 전화를 끊고 나서야 깨달았다. 내일 만나는 시간은 있는데, 만나는 장소가 없었다. 오전에 약속이 있다면서 한 시 이후에 일단 내려오라는 것이었다. 만나는 장소를 묻는 문자를 보냈다. 문자 확인이 5G 속도로 빠른 집주인이 이번에도 반응이 없었다.  


 이상한 마음에 집주인과 친한 N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집주인이 성격이 좀 그래도 돈 안 줄 사람은 아니다. 일단 와서 짐은 빼고, 현관 비번만 바꾸면 된다. 비번 안 알려주면 끝 아닌가? 어차피 짐 빼야 하는데 집주인 얼굴 보고, 돈 받으면 되지, 뭐가 문제야? 자꾸 그렇게 둘이 평행선을 달릴래? 나 오늘 바빠 죽겠는데, 임대인과 지금임차인이 왜 이렇게 전화해? 지금 내가 둘 전화 받아줄 이유도 없는데! "


 짐을 빼면 대항력에 문제가 생긴다고 들었는데, N부동산은 일단 내려와서 짐부터 빼라고 성화였다. 왜 이렇게 임차인 말이 안 통하냐면서 큰 소리를 쳤다. 임대인 할매가 허튼 소리를 하면 대신 혼나주겠다면서 내일 내려오라고 말한다. 갑자기 내 눈이 흐려지는 것 같았다.


 진정한 가스라이팅이었다. 집주인과 부동산 두 군데에 전화를 걸고 나서 순간 내 정신이 흐려졌다. '눈 뜨고 코 베이는 상황'이 연출됐다. 난 그렇게 가스라이팅에 반쯤 넘어갔다.


 그래도 이상했다. 동생, 친구에게도 집주인이 내일 만나자는 상황을 알렸다. 법에도 어긋나지만 집주인이 '무슨 짓'을 할지도 모르는 위험한 상황이라고, '절대 가면 안돼'라는 말을 듣고 나서야 정신이 돌아왔다.


 집주인을 모르는 옆동네 부동산에 문의했더니, '계약서 반납'을 요구하는 경우는 없다고 말했다. 일단 만나서 계약서를 돌려달라니? 그러면 순순히 보증금을 돌려주겠다고?

 계약서를 뺏기고, 집에 있는 짐을 빼면 나의 대항력은 사라지는데…


 오후 6시 22분. 051로 시작하는 전화를 받았다. 집 앞에 있는 M부동산이었다. 지금 집주인이 왔는데, 인테리어 수리할 게 있어서 비밀번호를 알려줘도 되냐고 물었다. 당연히 안된다고 말했다. 그랬더니 집주인이 냉큼 전화를 가로챘다.


 "아니~부동산에는 비밀번호를 잘만 알려주면서, 왜 나한테는 알려주지 않는 거에요?'라고 물었다. 아까 '방정맞다'라고 소리치던 70대 할머니는 공손했다.


 "보증금을 돌려주면 비밀번호 알려드릴게요. 그리고 9월 30일까지는 임대차 기간이라서 비밀번호를 부동산에 전체 공개했지만 10월부터는 어떤 부동산에도 알리지 않겠습니다."


 나 역시 공손하게 대답했다. 그랬더니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악당이 악마로 변신했다. 악마는 관리사무소 경리직원에게 말도 안 되는 갑질로 소리를 지르고, 나에게는 '방정맞다'라고 소리를  지르고, 주변 부동산에는 전화 그리고 방문을 통해서 소리를 질렀다.


 시간 많고, 에너지 넘치는 악마는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사건을 만들었다. 내가 '약속을 안 지킬 사람으로 보이냐?'라고 했던 집주인은 오늘이 지나도 송금하지 않았다.


 나는 내일 오후 한 시를 마감 시한으로 문자를 보냈다. 물론 답은 하지 않았지만.


 삼 년 간 힘들었던 부산행, 그 후 일 년을 더해서 4년째 나의 부산행은 끝나지 않았다. 이 시기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될까?


 부산지방법원, 서부지원 여기저기에 전화를 하던 오늘은 나의 휴가였다. 나의 휴가를 임대인에게 바쳤다니? 악마는 할머니의 얼굴을 하고 찾아왔다.

매거진의 이전글 짜고 치는 고스톱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