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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럼에도 Jul 26. 2024

물들다

 오늘은 또 어디로 갈 거니?


 랑아를 처음 데려왔을 때는 집안 배변판 위에서 앉아서 볼일을 보았다. 그런데 산책을 하고 삼일 만에 알아버렸다.


 랑아는 남자라는 것, 남자는 서서 쉬하는 자세가 있다는 걸 보더니 어느 날 볼일 보는 자세가 남자가 되었다다. 그리고 또 하나 녀석의 산책 취향이 생겨버렸다. 


 랑아의 산책 취향은 새로움이었다. 어제는 대로변 차들이 씽씽 달리는 길을 걷자고 하더니 오늘은 남쪽 방향, 내일은 서쪽 방향이었다. 거기다 집으로 오는 길도 왔던 길을 되돌아서 가려고 하면 갑자기 드러누워서 반항을 했다. 횡단보도를 건너서 반대편 차선으로 걷거나 탄천 위 다리를 건너는 방식으로 새로운 길만을 고집했다. 


 그렇게 늘 새로움을 원했다. 랑이의 호기심은 나에게는 새로운 고통이었다.


 나라는 사람은 늘 비슷한 옷을 입고, 비슷한 음식을 먹고, 똑같은 일상, 움직이는 동선도 최소한으로 움직였다. 그런 정해진 틀에서 벗어난다는 것이 힘들었고, 산책길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그렇게 우리의 산책은 나의 불평불만으로 시작해서 랑아의 반항으로 마무리하는 형식으로 마무리 짓곤 했다.


 너를 키울 수 있을까? 단지 한 마리의 강아지를 키우는 것인데 뭔가 내 일상이 송두리째 달라지는 이 느낌은 무엇일까? 


 목줄은 랑아가 했지만 끌려다닌 건(?) 나였다. 그렇게 이 동네, 저 동네 구경하면서 나와는 다른 사람들의 모습을 바라볼 수 있었다. 주택가가 몰려있던 한 동네에 가죽공방이 있었다. 저녁 8시가 가까운 시간, 가죽공방의 클래스가 열리고 몇몇 수강생들의 모습을 보게 되었다.


 취미라고는 하나 없는 내 모습, 이런저런 사람들 모임에나 필참 하는 취향 없는 나로서는 낯설고도 부러운 장면이었다. 취미를 가지고 취향을 가진 사람,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으로 멀게만 느껴졌다.


 일 년을 살아도 몰랐던 풍경을 반려견이 온 지 일주일도 안 돼서 동네 구석구석을 파악할 수 있었다. 너라는 녀석의 호기심으로 나라는 사람도 궁금증을 더해가고, 알아가는 하루하루였다.


 한 번은 산책 중에 현수막 한 장을 보았다. 시청 강당에 열리는 시민강좌 홍보였다. 드라마 '미생'의 윤태호작가님의 강좌가 저녁 일곱 시 반에 열린다는 내용이었다. 드라마를 재밌게 보았지만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자리였다. 그 이름은 강연회.


 한 번도 해보지 않은 일은 처음이 가장 어려웠다. 그렇게 갈까 말까를 망설이다가 퇴근 대신 시청으로 향했다. 그렇게 시간 동안이나 누군가의 말에 몰입하는 시간을 가졌다. 드라마보다 드라마 같은 치열한 삶을 살았고, 산전수전을 겪어낸 현인이라는 말밖에 없는 작가님이셨다.


 그날은 처음 강연회라는 장소에 간 날이었고, 강연회를 찾아다니는 첫 번째 기념비적인 날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했던 그날의 시작은 산책길에 만난 현수막에서 시작했다.


 그 시작으로 일 년에 몇 번은 강연회에 가거나 강연회 영상을 찾아 보게 되었다. 처음엔 무료 강연을 어떤 날은 유료 강연회에도 참석하게 되었다. 시작은 그렇게 새로운 시작을 불렀다.


 나의 호기심의 시작과 비밀은 랑아였다. 호기심 많은 성격의 반려견을 만나고, 나 역시 랑아의 취향에 물들었다. 덕분에 배웠고, 덕분에(?) 피곤하게 끌려다녔던 산책길!


 산책을 한다. 기나긴 산책길로 숨이 넘어갈 것 같고,  언덕길에서 달리다 목줄을 놓치는 바람에 그루터기에 발이 걸려 넘어져서 십 센티 넘게 살이 찢어지기도 하고... 울고 웃는 우당탕당 가족이 되었다. 


 편안하지만 익숙하고도 지겨운 일상을 송두리째 바꿔버린 랑아, 좋아하는 저자의 강연을 찾아다니고, 독후감 공모전에 글을 쓴 것은 랑아가 알려준 세상을 체험한 후였다. 무기력한 내 인생에 찾아온 가장 큰 행운은 널 만난 날이었어.


 태어나줘서 고마운 생명체, 랑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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