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림보

글 쓰기 좋은 날

by 그럼에도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정말 늦은 때다!


지금이 그렇다. 내일까지 원고가 도착해야 하는 데, 지정 분량인 A4 60장을 채우지 못하고 지금 37쪽을 쓰고 있다. 이야기는 클라이맥스 직전에 사건 발발까지만 썼는데, 이 속도로는 오늘 5시 전 제출이 어려울 것 같다. 거기다 이런 날 왜 일정을 잡았는지.


피아노학원과 이사를 위한 상담 일정, 근처 약속까지 너무 많은 일들을 잡아 놓았다.


이렇게 미뤄둔 숙제를 하는 지금은 여름휴가 기간이다. 처음 며칠을 넷플릭스 시리즈를 보다가 날렸고, 지금은 밀린 숙제를 못해서 한숨만 쉬고 있는 휴가이다.


나는 글쓰기 좋은 럭셔리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쓸 나의 사촌, 아빠 집안은 전형적인 콩가루 집안으로서 민폐의 역사 그 자체였다. 소설에서나 볼 법만 인물들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교도소에 가지는 않았으니 글 쓰기에 적당한 만큼의 사건 사고를 어려서부터 눈으로 보고 자랐다.


결혼 전, 지금의 남편 어머니가 유난스럽게 말씀이 많고, 악담이 길어서 이상하긴 했다. 하지만 완벽한 중산층의 조건을 가진 그 무엇이 나와는 다른 배경화면이라는 점이 매력적이었다. 내가 경험하지 못한 안정됨, 여유와 풍요가 있는 남편과 남편의 가족들이었다.


그런데 그게 결혼 후 일 년도 가지 않았다. 행복은 밋밋하고, 단순했다. 어제와 오늘이 특별한 변화가 없었는데, 남편의 어머니는 그런 행복을 지겨워했다. 새로운 도파민을 찾아다니시는 일상이 안쓰럽기도 했지만 넘치는 에너지를 감당할 수 없는 안락한 노후의 어르신이 부럽기도 했다.


그런 안락함이 화를 불렀다. 평소 귀가 얇고 아무나 만나던 습관이 결국 자산의 90%를 날리는 결과를 만들었고, 그 과정은 코미디 그 자체였다. 남들은 통장에 있는 돈을 날릴 때, 집을 담보로 움직이는 그 무모함마저도 새롭고 즐거운 일상처럼 보내셨다는 걸 일이 끝나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그렇게 안락한 노후는 끝났지만 모두에게 비밀인 이 사건을 글로 쓰는 중이었다. 비슷한 사건이 부산에 한 경찰서에서도 조사 중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서울의 OO경찰서는 아직 수사는커녕, 손을 놓고 있는데 같은 유형의 사기를 부산 OO경찰서는 맡자마자 대출중개인 핸드폰까지 압수해서 포렌식으로 조사까지 들어갔다.


물론 이 사건을 기획한 실제 범인은 잡지 못했고, 연결 고리도 찾지 못했다. 며칠 전까지 내 마음을 흔들어놓았던 '트리거'라는 드라마도 대부분은 실제 사건을 기반으로 했다.


피해자는 있고, 가해자는 처벌받지 않는 현실 속에 트리거라는 드라마는 등장한다. 어쩌면 나의 이야기도 그와 비슷한 선상이었다.


그런데 나는 게을렀다. 공모전 일정을 마감 보름 전에 알기도 했지만 보름의 시간을 나태하게 보냈다. 시간은 있었고, 글을 머릿속에서만 맴돌았고, 타이핑은 아직 갈피를 잡지 못했다.


내 인생은 이렇게 글감이 풍요로운데, 결과는 없는 그 무엇.


지금을 설명하는 문장을 말하자면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

- 오역되었다가 알려진 버나드 쇼 묘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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