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림보

콤플렉스

by 그럼에도

운다고 해결되는 일은 없지만...


이상하게 눈물이 난다. 운전을 하다가도 눈물이 났고, 오랜만에 읽은 책 한 페이지에도 눈물이 고였다.


심각한 우울함이 이 주일째 감돌고 있었다.


시작은 사소했다. 엄마가 동생의 입장을 전화로 전달한 직후였다.


"서로 피해 주는 거 아니니까 동동이 일에 참견하지 마라. 그리고 동동이도 너 안 보고 살고 싶다더라. 동동이는 임신했다고 하고, 출산 예정일은 내년 봄이다"

마치 동동이의 대변인이 된 것처럼 동생, 동동이의 말을 전해주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불 같이 화가 일어났다. 화산 폭발하는 기운으로 엄마에게 큰 소리를 질렀고, 욕이 나왔다.


그날부터였다. 가슴에 불길이 시작한 건.


사실 동동이는 달랐다. 동동이가 고2가 되던 해, 나는 부모님을 설득해서 서울로 전학을 시켰다.


그것은 스스로 시작한 것이었다. 콤플렉스, 나에겐 콤플렉스가 있었다.


대학교 입학 조건에 '수시'라는 입학 요건이 생겼다. 나는 그게 무엇인지 몰랐고, 부모님 역시 먹고 살기에도 바빴기에 몰랐다. 그게 어디에 쓰는 것인지도. 학교를 졸업하기 직전에 우연히 나갔던 독일어 대회를 나갔다가 알게 되었다. 그때 실력이면 수시로 고려대 독문과 입학이 된다는 것을.... 하지만 고3에 나간 대회 하나로는 불가능하다는 것도.


초등학교 시절 피아노학원 1년과 속샘학원 몇 달을 다닌 게 내가 받은 사교육의 전부였다. 교육이라는 단어는 집 안에 없었다. 그저 수능시험만 잘 보면 대학교를 간다고 생각했는 데.... 그렇게 기회를 알기도 전에 놓치고 말았다.


회사에 들어오니, 출신 학교를 가지고 사람을 판단하고, 차별 대우를 대놓고 하는 사람들 속에 있었다. 그런 나의 콤플렉스를 동생은 갖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욕심은 동생을 서울로 불러들였다. 서울의 사립여고에 전학을 시키고, 동생의 사교육비에 월급의 일부를 보태기 시작했다. 물론 결과는 처참했다. 사교육 전과 후, 성적은 변함없이 그 자리였고, 내신도 좋지 않았다.


그렇게 점수에 맞춰서 그냥 대학을 갔다. 동생이 대학을 졸업한 후, 취업을 해서는 나와 함께 살면서 일종의 지원을 받았으니 대략 십이 년 간 나의 경제적 지원을 받았다.


거기다 결혼을 해서도 가끔 문제를 일으켜서 동동이 남편의 하소연을 듣고 있는 지금의 상황은.... 엄마의 말씀은 틀린 것이었다. 나는 평범한 언니가 아니었고, 경제적 기반을 제공한 사람이었다. 그런 모든 상황을 아는 엄마가 '너랑 무슨 상관이 있냐'는 말에 눈물이 흐르고 가슴에 불꽃이 터졌다.


갑자기 모든 게 허무해졌다. 어려운 집 안에 보탬이 되었다는 것도 후회스러웠다. 그냥 나 혼자 잘 살 걸. 그때 그렇게 펑펑 쓰던 돈으로 서울에 집이나 살 걸. 어차피 동생들 고마워하기는커녕 다 커서 참견하지 말라고 귀나 틀어먹는 애들을.


어려서 순하게 웃던 동생들이 이제는 눈을 부릅뜨고 큰 소리를 냈다. 그동안 했던 걸 돌려받을 생각도 없었지만 그 태도에서 오랜 시간 공들여 쌓아 온 탑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또래보다 뒤처진 것 같은 나의 자산 상황에 현타를 느낀 건 몇 년 전이었다. 결혼을 하고 보니, 현실이 왜 이렇게 투명하게 보일까? 거기다 난임센터를 다닌 지 일 년이 되고, 여러 번의 노력에도 결과가 좋지 않았다.


작년 12월부터 남편 집안의 사기 사건, 회사 구조조정 위기, 사내 이슈, 난임 문제까지 분기별로 사건이 있었다. 이번에는 동생이 일으킨 말로 시작한 불길이었다.


말을 한 당사자는 모든 것을 차단하고, 본인이 할 말을 엄마 통해서 듣게 하다니.


불같이 화내는 내 모습에 엄마도, 아빠도, 다른 동생들도 놀란 눈치였다. 다만 용기를 내서 말한 건, '너무 이 일에 몰두하지 마, 기분 탓이 아닐까'라는 말이었다. 그 말에도 눈물이 흐르고, 화가 났다.


그동안 어떤 일이 생겨도 너무 쉽게 이해하고, 혼자 참고 지나갔던 일들이 지금의 사태를 부른 것만 같아서 스스로를 자책하게 되었다.


나이 들면 남는 건 가족 밖에 없다고 하던데. 나에겐 그 말도 맞지 않는구나.


은혜를 원수로 갚는 동생도, 동생을 말을 아무 생각 없이 전달한 엄마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가능하다면 아주 오래 멀어질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을 하고 볼 일이 없음에도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나의 분노는 시간이 지나서 의욕 없음으로 변해갔다. 평소보다 농도 짙은 무기력함이 감돌았다. 아주 오래전 관심 있는 글쓰기 강좌를 등록한 날이었다.


강좌를 가기 한 시간 전에 마음이 달라졌다. 가기 싫었다. '지금 출발해도 이십 분 지각할 거 같은데 그냥 가지 말까? 우울한데 집에서 쉴까?'라는 생각에도 결국 집을 나섰다.


글쓰기 강좌 첫 수업은 저자의 이야기를 가만히 듣는 것이었다. 가기 전보다 낫다는 생각을 했지만 다녀와서도 무기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밤 10시가 넘어서 반려견과 산책을 다녀오다가 다른 입주민과 인사를 하고, 강아지 간식을 먹이던 중에 사고가 발생했다. 흥분한 반려견이 그만 입주민을 물어버렸다. 밤 12시에 응급실을 가서야 넋 나간 정신이 돌아왔다.


정신을 못 차리고 사니, 여기저기 나사가 헐거워진 기계처럼 문제가 발생하는 게 아닐까? 그렇게 나는 무기력함을 사건사고로 마무리하게 되었다. 다친 분을 보험으로 접수하고, 제대로 책임지는 일에서... 더는 넋 놓고 살 수 없었다.


그렇게 불 같이 화내고, 내 몸과 마음까지 사그라들었던 8월의 마음이 오늘로 마무리되었다. 주변 환경이 아무리 흙탕물이어도 도도하게 꽃 피는 연꽃처럼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다부진 마음과 체력이 필요한 것인가?


가족이라고 해도, 마음에 금을 긋는 사람과는 시간과 함께 멀어질 것임을 알려주었다. 결혼이 벼슬도 아닌데, 종교도 아닌데. 결혼하기 전에는 회사 윗사람들에게 가스라이팅 당하고, 결혼해서는 남편의 말을 종교처럼 따르는 동동이가 답답하고, 밉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동동이 말대로 각자의 인생이고, 선택이었다. 가족을 돕는다는 마음은 오지랖이었을 뿐, 결국 본인의 이익대로 움직이는 게 사람이라는 씁쓸함으로 시작한 9월이었다. 다행히 눈물은 멈췄고, 마음도 차가워졌다.


나는 뭐 잘 살고 있는가? 모든 게 엉망, 뒤죽박죽. 집 안의 살림마저 엉망이었다. 내 한 몸을 챙기고, 집 청소부터 다시 할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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