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림보

라이징 스타

by 그럼에도

"전 직원 앞에서 발표할 수 있어요? 그냥 총무나 잘해요. AI 해보고 싶으면 본인이 직접 배워서 팀원들 앞에서나 해봐요!"


전 직원 워크숍, 팀 워크숍이 이틀에 걸쳐 끝나고 저녁 식사가 이뤄졌다. 식사 자리부터 취기가 돌았던 팀장은 2차로 간 호프집에서도 이미 만취였다.


그런 팀장이 막내직원 옆자리에 앉아서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난 팀장의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었기에 대화가 들렸다.


AI가 활성화되면서 회사 업무도 달라졌고, 관련된 프로젝트가 꽤 만들어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 프로젝트가 있으니 나나씨는 지원하라는 말이었다. 듣다가 나도 한 마디를 덧붙였다.


"저도 AI 관련 프로젝트를 해보고 싶어요. 어디에 공고가 났나요?"


라고 묻는 말에 팀장은 위에 말을 던졌다.


"그냥 총무나 잘해요!"라니....


여기서 말하는 총무는 공식적인 직함이 아니다. 그저 팀 내에 공지사항이 있으면 알리고, 회식할 때 식당 예약을 하는 말 그대로 잡다한 일이고, 다들 피하고 싶은 역할이었다. 유일한 장점이 있다면 팀장과 가까워지는 것인데 보통은 팀의 막내이거나 팀장과 꽤 친한 사람들이 그 역할을 대신했다.


그런데 기존 총무가 여러 프로젝트를 맡느라 힘들다는 이유로 그 역할이 나에게 던져졌다. 평소 직원들과도 소통하지 않았고 팀장과도 사이가 좋지 않은 나에게 말이다.


지금 내가 다니는 이곳에서 사람들은 서로 프로젝트를 맡고 싶어 한다. 그래서 경쟁이다. 같은 월급을 받고 일을 더 하겠다고 하는 게 이상할 수도 있지만 그게 먹고살기 위한 현실이다.


회사는 삼 년 주기로 구조조정을 하고 있다. 프로젝트 참여자라는 한 줄, 한 줄이 귀한 스펙이 되고 잘 나가는 팀에 합류하기 좋은 조건이 된다. 물론 구조조정은 사십 대 이상에 해당된다. 이십 대와 삼 심대는 스펙 없이도 다양한 곳에 합류하기 좋고, 부르기 좋은 조건에 해당된다.


그러니까 사십 대에게 한 줄의 스펙은 꽤나 소중하다. 그걸 팀장도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이번에는, 즉 내년에는 나의 스펙이 모두 사라질 예정이다. 맡고 있던 스펙 하나도 팀장이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라고 말했었다.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을 위해서라고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순순히 넘긴 사람은 알고 보니 나 한 명이었다. 다른 직원들은 기존 자리에서 버텼고, 팀장은 조용히 넘어갔다. 순순히 넘긴 나에게 주어진 자리는 스펙에 해당하지 않고, 그저 술자리를 예약하고 지키는 잡무의 중심, 총무를 맡겼다.


뭐지? 지난번 일에 대한 앙심일까? 본인이 부당하게 규정을 어기라고 했던 걸 어기지 않은 보복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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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기다 팀 막내는 이미 여러 프로젝트에 참여 중이었다. 이미 전 직원 앞에서 발표도 했고, 회사의 라이징 스타로 자리매김하고 있었다. 이미 잘 나가고 있는 사람에게 날개를 넘어서 왕관까지 부여하고 싶은 것일까?


막내 직원은 삼 년 전에 지금의 팀장이 직접 뽑은 직원이다. 그래서일까?


막내 직원이 회사에서 잘 나간다는 것은 그를 채용하고, 잘 나가는 보직으로 밀어준 팀장까지 같이 빛나게 된다. 두 사람이 동시에 빛나기에 팀장들은 신입 직원들에게 빛나는 자리로 밀어주는 관행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막내 직원은 본인이 가장 역량보다 더 빛나는 스펙을 갖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기존 직원은 다르다. 프로젝트나 어떤 자리에서 좋은 평가를 받으면 본인 한 사람만 빛나게 된다. 팀장의 노력이 아니라 기존 직원의 내공만 빛이 난다. 그러니 보통 팀장이 아끼는 친한 직원이 아니고서는 기존 직원을 라이징 스타로 만들지 않는 패턴이 있었다.


거기다 지금 팀장은 유독 편애가 심했다. 사이가 좋은 (기존 직원) 우기 씨와 막내 직원 나나씨에게 모든 프로젝트를 맡기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무런 보직도 없고, 관계도 좋지 않은데 식당 예약이나 하는 총무 자리가 달가울 리 없다. 이미 마음이 상한 상황에서 짜증이 나는 일이 추가되었다.


"나나씨가 치킨을 좋아하니까, 생일달에 해당하는 사람에게 치킨쿠폰을 보내줘요. 총무님"


총무는 팀원들에게 일정 회비를 걷어서 커피타임이나 번개 모임의 비용을 지출하고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기존 총무한테는 시키지도 않던 생일 챙기기 업무가 추가되었다. 친한 직원에게도 안 시키던 일을, 왜 또 나에게 시키는 걸까? 12월부터 총무 시작인데, 나나씨 생일이 마침 12월이기도 했다. 그렇게 예쁘면 직접 사주면 될 것을...왜 또 나한테...


그렇게 꼬리에 꼬리를 물다 보니, 내년 새해가 다가오는 게 반갑지 않게 느껴졌다.


차별적인 발언이지만 늦은 시간까지 술자리를 지키는 역할은 보통 미혼 직원이거나 기혼일 때는 남직원들이 주로 담당했었다. 술자리에 늦은 시간까지 남는 사람들이 돈을 내기도 좋았으니까.


그런데 술자리에 늦게까지 참석하지도 않고, 잘 마시지도 않는 나에게 왜 이런 역할을 주는 걸까? 기혼이지만 앞으로도 아이가 없을 가능성이 높아서일까? 사람들은 아직 내가 시험관 시술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 시험관을 하면서 염색도 해본 적이 없고, 술도 좀처럼 마시지 않는다는 사실도.


알렸다고 하면 도와주기는커녕, 병원 다닌다고 일을 안 할까 봐 눈에 불을 켜고 감시할 사람들이니까. 안 그래도 피곤한데 팀장이 예뻐하는 막내직원까지 한 술 더 떠서 본인의 업무를 대신 떠맡기고 싶어서 난리였다. 연차가 쌓이면 알고 싶지 않아도 남의 속마음도 어느 정도 읽히는데...


어린 나이와 외모를 어필하면서.... 잡일에 잡일을 더하려고 하는 녀석의 심보가 꽤나 거슬린다. 나의 호의가 언제까지 계속될 거라고 생각하는 거니?


얼마 전 들었던 AI 강의에서 강연자는 말했다. '미래는 적응하는 것이 아니라 Shaping'하는 것이라고.


나는 타인들이 씌운 굴레에서 벗어나서, 알아서 배우고, 알아서 스펙을 쌓아가기로 했다. 얼마 전 진행했던 프로젝트의 아이디어의 원천 역시.... 과거에 회사 밖에서 발표 및 그림까지 모 단체의 과정을 이수하고 준비했던 것의 결과물이었다.


우연은 조금도 없었다. 그렇게 시간과 노력이 쌓아 올린 필연이었다. 누군가 내 앞 길을 정성스럽게 막아버린다 해도 나의 다른 길을 Shaping 할 것이다.


미래는 만드는 자의 것이니까!






이미지 출처 : https://kr.pinterest.com/pin/6685099439278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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