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느림보

어떤 능력

by 그럼에도

"인테리어 감리나 고시텔 사업을 해도 잘할 것 같아요."


집 근처 전기업체 사장님과 대화가 끝날 무렵 하신 말씀이었다.


욕실 콘센트에 드라이 선을 꽂는 순간 전기 스파크와 함께 정전이 일어났다. 바로 수리를 해야 했지만 왠지 큰 공사를 해야 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으로... 몇 달을 미루다가 오늘에서야 수리를 맡기는 날이었다.


수리는 다행히 크지 않아서 콘센트 근처 전선 정리와 청소, 교체로 간단히 이루어졌다. 일을 하시는 동안 커피를 사 와서 전달드렸다. 일이 끝나고, 간단히 전기 배선에 관련한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다가 이야기가 길어져서 결국 한 시간 동안 대화가 이루어졌다. 평소 사교적인 성격도 아니고, 말을 잘하는 사람도 아닌 나란 사람. 그런데 '안전'이라는 공통분모가 생기는 순간, 평소 궁금한 것을 질문하고 듣다가 말이 길어져 버렸다.


일흔이 가까워 보이시는 사장님도 어느새 과거 사장님 경력을 말씀하시면서 한 편의 드라마가 시작되었다. 일곱 살에 서울에 올라와서 학교에 갈 나이부터 일을 시작하셨다는 사장님의 손은 아빠와 닮아 있었다.


아빠 역시 열 살이 조금 지나서 소년 가장이 되었고, 아빠가 살아온 굴곡진 역사만큼 손가락 마디마디가 굵어졌고 두꺼운 손톱 끝은 마모가 심했다. 그래서인지 나의 눈길은 사장님의 손가락에 있었다. 익숙한 손가락을 가진 낯선 사람이 오랫동안 보아 온 동네 아저씨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사장님은 IMF 전까지 인테리어 사업을 하셨던 분이었다. 경제 위기가 오면서 큰 빚을 지게 되었고, 사업을 접었다고 하셨다. 대신 전기 관련 일만 현재까지 이어오신다고 하셨다. 더하여 아는 인테리어업체 사장님의 전기 배선일이나 주변 건물의 주차차단봉 관련 일도 담당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렇게 말씀을 듣다가 나 역시 지금 현재 집의 리모델링 과정과 누수 건, 부모님 집 리모델링을 직접 진행하고 공사 후 누수 건이 발생했던 것 , 전액 보상을 받아낸 일을 말씀드렸다. 그렇게 긴 과정을 짧게 설명드렸더니 사장님은 나이를 물어보셨다.

지금 회사에 다니지만 앞으로 몇 년이나 더 다닐 수 있는지 모르지 않냐고. 집의 인테리어 상태나 누수 건도 잘 처리한 걸로 봐서는 인테리어 관련 사업을 해도 잘할 것 같다는 말씀을 주셨다.


오랜만에 칭찬을 듣고 너무나 감사했다. 정말 재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생각지도 못했던 분야를 말씀해 주셔서 신기하기도 했다.


칭찬의 이유는 크게 두 가지가 있었다. 인테리어 상태라는 것은 일단 타일을 보고 말씀하셨다. 지금 집의 타일과 구배(화장실 바닥을 살짝 경사지게 하는 것)에 신경 썼다는 것을 말씀드린 적이 없는데 사장님은 욕실을 보고 한눈에 알아보셨다.


칭찬의 두 번째 요소는 '경우를 지키는 것'이었다. 사장님은 젊어서 유명 연예인(가수 송 OO, 배우 백 OO) 집 인테리어도 진행한 경력을 갖고 계셨다. 유명하고 인기 많은 스타였지만 집에 일하러 온 작업자들을 무시하고 하찮게 대했던 과거 이야기에서 마음의 아픔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처럼 노동을 하는 사람들은 경우를 지키는 것을 중요하게 본다고 말씀하셨다. 왔을 때 '일해줘서 감사하다'라는 말 한마디와 '커피 한 잔'이면 일하는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다고.


사장님이 오시자마자 인사하고 커피를 대접하는 자세에서 '일을 맡길 줄 아는 능력'을 보셨다고 하셨다. 대접은 일이 끝나고 하는 게 아니라 일을 시작할 때 하는 게 중요하다는 말씀까지 덧붙여서.


인테리어에 대해서 많이 아는 것도 아니고 그저 생활하기 편한 정도에 관심이 있었을 뿐인데 사장님은 배워보면 생각보다 어렵지 않은 일이라고 하시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가셨다. 여기는 '믿을만한 사람'이 없는 분야인데 수요는 늘 있어서 괜찮은 분야라고.


사장님의 말씀 한 마디에 인테리어 일을 본격적으로 배울 생각은 현재 갖고 있지 않지만 그래도 마음이 따뜻해진 이유는 다른 것이었다.


지금 회사에서 후배들에게 좋은 자리나 기회를 양보해야 할 때, 나라는 사람이 쓰임이 적어졌을 때 느꼈던 작아졌던 마음이... 나란 사람에게 다른 기회와 가능성도 있을 수 있다는 작은 희망이 보였다. 몰랐던 분야에서 어떤 가능성이 있다는 말씀이 감사했다.


더하여 노동을 하는 분에게 지켜야 할 예의라는 것은 사실 아빠에 대한 예의이고, 내가 살아온 환경에서 당연한 것이었다. 농촌에서 태어나서 자란 사람으로서 가진 나의 자산은 노동을 하대하지 않는 것이다. 노동의 어려움, 두꺼운 손가락 마디마디가 의미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사장님과의 한 시간의 대화가 의미 있고 재밌었다. 가능성도 말씀해 주셨지만 수입타일과 국산타일의 차이, 전선의 굵기가 의미하는 것, 중국산 배터리 충전의 위험성도 배우는 '과학 공부'시간이기도 했다.


살면서 힘든 일도 많지만 살아 보니 배우는 것도 많았다. 사흘간 남편이 만든 문제로 마음고생이 심했었다. 왜 이렇게 힘든 일이 차례차례로 찾아오는 걸까? 이 또한 내가 이 사람을 선택한 결과라는 것에 슬펐고 스스로를 자책했다. 어른이란 선택의 결과를 책임진다는 건데, 왜 이 사람은 책임질 능력이 부족한 지도 원망스러웠다.


세상에서 유일하게 조절할 수 있는 건 나 자신 뿐이었다. 타인은 그들의 세상을 살아가니까. 평생을 함께하는 것은 나 밖에 없으니까.


단단한 오늘을 살아가는 것, 결과에 책임을 지는 어른이 되는 한 발자국을 걷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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