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미니멀리즘

이병률, '단추가 느슨해지다'

by 그럼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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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추가 느슨해지다]

이 병 률


인연이 느슨해져서

꽉 물고 안 놓을 것만 같던 인연이 헐거워져서


할 수 있는 일이 그것뿐이라서

밤길을 걷고 걸었다


집으로 돌아오기보다는

집을 나서야 하는 게 마땅하지 않을까 싶어


밤길을 걷다 돌고 돌아서도 걷다가

머리를 밀어볼까도 생각하였다


우리는 단추 같은 존재들이기도 할 것이어서


같은 단추들과 나란히 배열을 이루다가도

떨어져 온데간데없이 잃어버리고 마는

단추 같기도 할 것이어서


도무지 헐렁해져서 어느 날 다시 입을 수 없는

벗어놓은 바지 같을 것이다


우리의 어떤 일 같은 것들은 단추가 되어

매달리기도 하고


우리의 아무 일 같은 것이 단추가 되어

느슨히 떨어지기도 하는


그 극명한 절정의

전과 후가 만들어낸 길을 걷다가


그만 실을 밟고 실에 감겨 넘어지면서

밤길을 걸었다


오디오북으로 '나의 하루는 4시 30분에 시작된다'책을 귀로 읽었다. 음악처럼 틀어놓고, 집안일을 하며 듣는데 책의 뒷부분이 반전이었다. 새벽 4시 반에 일어난다는 주인공 이야기 끝부분은 '인간관계의 미니멀리즘'이었다. 새벽 시간 오롯한 몰입의 중요성을 이야기하다가 끝에는 '관계'에 대한 미니멀리즘이 등장했다. 나의 시간을 지키기 위해 타인과의 일정한 간격과 규칙을 만드는 미니멀리즘.


물론 이런 저자를 멀리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존중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시에 나오는 나란히 함께 있는 단추들 속에서 가장 먼저 떨어지는 단추도 생길 것이다. 가정 먼저 떨어지는 단추가 나일 수도 타인일 수도 있다.


시간과 함께, 마음과 함께 인연의 미니멀리즘이 찾아왔다.


그림 https://www.instagram.com/p/BvTHfeYH-5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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