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년 전 오늘을 기억하며
차갑게 굳어, 숨이 사라져 버린 건장한 체격의 이십대 청년이 다급하게 응급실로 실려왔다. 아마 사고를 당한 것 같았다. 구조대의 들 것에 실려오는 환자의 뒤를 이어 누나쯤으로 보이는 여자가 허망한 표정으로 응급실 앞에 멈춰 섰다.
잠시 뒤 응급실 의사는 그녀와 가족으로 보이는 사람들 앞에 서서 당신의 아들이, 당신의 동생이 숨을 거뒀노라 말했다. "최선을 다했지만 안타깝게도." 몇 마디 후, 엄마로 보이는 중년의 여성은 그 자리에 쓰러졌고, 가족들의 울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망하셨습니다. 2014년 6월 24일 00시 00분."
1991년 6월 1일 1남 2녀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그는 24살이 되던 해 사망했다. 경찰공무원이 되고 싶어 다니던 대학을 휴학하고 제대를 하자마자 독서실 총무 알바와 시험공부를 병행하던 중이었다. 그녀의 큰누나는 그를 똑 닮은 이제 막 서른 살이 된 회사원이었다. 20대를 바쳤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크게 나쁘진 않은 지루하고 안정적인 직장에 다니면서 '그래 이 정도면 괜찮지.’ 그렇게 매일 주문을 걸고 있었다. "이제 정착해야죠."라 말하며 혼자서는 여전히 미련의 끈을 놓지 못한 채 살았다. 꿈도 사랑 같은 것도 지지부진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인생의 불행이 보통의 지루한 삶을 덮쳤다. 지루해, 재미가 없어 라는 말을 조소하듯이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삶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이번 일 만큼은 조금도 예비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녀 앞에 싸늘하게 주검이 되어 나타난 동생의 시신을 마주했다. 동생을 마지막으로 만나 대화를 나눈 건, 사고가 있기 이틀 전 집 근처 횡단보도 앞에서였다. 왜 '힘내'라는 말 대신 '시험이 얼마 안 남았으니 정신 똑바로 차리고 준비해야 한다'는 그런 말을 건네었을까. 시험에 붙지 않고 떨어져도 네 인생은 계속되며 다른 일을 하면서도 충분히 행복한 인생을 살 수 있다고 말하지 못했을까. 그녀는 동생의 장례식 이후 아주 오랫동안 그런 생각에 빠져있었다.
그녀는 동생의 유골함을 가슴에 안았다. 한 품에 들어오는 이 작은 유골함에서 이제 막 화장을 마치고 나온 동생의 열기가 전해져 왔다. 뜨거웠다. 백 팔십이 넘는 키에 농구를 좋아했던 그녀의 동생은 몇 줌의 재가 되어 큰누나의 품으로 들어왔다. 뜨거운 열기가 그녀의 손에, 그녀의 가족의 손에, 생전에 사랑했던 친구들의 손에 담겨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그는 어디론가 떠났고, 아무도 그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모두가 생전의 아픔을 잊고 어딘지 모르는 그곳에서 행복하길, 편하게 쉬길 바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