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라도 내리면 핑계 삼을 일이 생기니까
나는 비를 좋아한다. 정확히 말하면 바깥에 후두둑하고 내리는 빗줄기를 실내에서 보는 것, 탭댄스를 추듯이 바닥을 울리는 빗소리를 잠자코 가만히 듣는 게 좋다. 세차게 내리다 가늘어 지는 빗줄기를 보면서, 비에 흠뻑 젖은 길에 투명하게 반사되어 미끌거리는 그 반짝임이 마음에 든다고 생각한다. 풍경 위에 한꺼풀 니스칠을 한 거 같다.
“비오면 우울해지지 않아?” 사람들은 자주 묻는다. 그럼 나는 되묻는다.
“그렇다고 햇볕 쨍쨍한 날에는 뛸듯이 기뻐지던가요?”
비가 온다해서 우울해지거나, 날씨가 쨍쨍 뙤악볕이 내리 쬔다고 해서 우울하지 않은 것도 아니다. 어디 저명한 학자들의 조사결과에 따르면, 우울한 날씨가 우울증과 상관관계가 높다곤 하더라. 물론 날씨의 영향을 무시할 순 없지만 예측불가한 자연의 심사에 휘청이는 내 감정날씨는 스스로 다스려보자는 주의다. 이것마저 못한다면 나의 우울은 전적으로 내 책임이다.
대학 때 교환학생으로 몇개월 간 머물렀던 영국엔 예상치 못하게 종종 부슬부슬 비가 내리곤 했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볕이 나기도 한다. 처음부터 우산을 챙겨다니기를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몇번의 강풍에 찢어져버린 우산들을 전리품처럼 작은 내 기숙사방에 쌓아갈 어느 때 였다. 우산대신 기모가 넉넉히 들어간 후드티를 거금을 주고 장만했다. 이거 하나면 번거롭게 무거운 책가방에 우산까지 짊어질 필요가 없었다. 우산 대신 티셔츠에 달린 모자를 쓰면 금새 비는 그치고 마니까. 게다 이어폰을 꼽은 귀를 단단히 덮어주는 모자 덕분에 음악감상을 하는 청감도 덩달아 좋아진다. 음악소리 외 모든 잡음이 차단되는 효과가 있다. 이런 이유들로 기모티셔츠에 달린 모자가 필요해지는 비가 오는 그 순간이 참 반가웠었다. 매일 후드티를 입는 자신에게도 면죄부를 준다. "네가 꾸미는데 게을러서가 아니라 '비가 오니까' 그런거야."라고. 하지만 스무살 버릇은 서른살까지 간다는 걸 알게 됐다.
맑은 날엔 어떤 핑계도 대기 힘들다. 날이 맑은데 집안에 틀어박혀야 할 이유도, 기분이 바닥으로 무겁게 내려앉을 당위성도 없다. 어렸을 때 들었던 Ref의 '이별공식'이란 노래의 가사에도 비슷한 맥락의 얘기가 나온다.
햇빛 눈이 부신 날에 이별해봤니? 비오는 날 보다 더 심해. 작은표정까지 숨길 수가 없잖아.
햇빛 눈에 부신 날에 이별해 본 결과 이별 후유증이 더 큰 것 같았다. 숨겨야 할 표정이 있었다면 선글라스라도 낄 것을. 맑디 맑은 날,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날씨에 겪는 비극적 사건, 사고(?)는 생각보다 오래도록 기억에 남는다. 가끔 잔상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다고 일기예보를 확인하고 이별하러 가는 날을 정할 수는 없으니 그건 운명이었다 여긴다. 그런 날씨엔 우리 모두가 참으로 한 치의 오차도 없는 이성적인 판단을 내렸을 것이다. 다만 너무 땀을 삐질삐질 흘렸던 사나운 모양이 떠올라 가끔 이불킥을 하고 싶을 때가 있을 뿐.
그래서 비오는 날이 좋다. 나의 아둔함, 미련, 게으름에 더불어 못생김 마져도 비를 핑계삼을 수 있으니까. 그리고 이왕 이렇게 된거 하릴없이 노래나 듣던지, 그림이나 끄적이던지 적당히 대충 책이나 떠들러 보면서 시간을 허비한다. 다들 그런 때가 있지 않나. 누구의 탓으로 돌리고 무엇을 핑계대면서 그들을 방패삼아 나를 돌보고 싶은 날 말이다. 오늘이 그런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