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랭보 Jan 27. 2022

샐러던트의 애로사항

설문지 그까짓 거 그냥 돌리면 되는 거 아닌가요?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원을 다니는 일은 인간의 의지만으로는 어렵다는 것을 절실히 느끼는 요즘이다. 보통 직장인들은 경력 관리의 연장선상에서 이직이나 몸값 올리기 등을 염두하고 대학원을 선택한다. 사기업에 재직할 때는 해외 MBA를 가거나 그게 여의치 않으면 국내 MBA를 다니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공기업으로 이직한 후 그 필요성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1. 몸값을 올릴 수 있는가? 아니오.

2. 이직을 염두하고 있는가? 아니오.  


자기 비즈니스를 할 게 아니라면 내 인생에 앞으로 이직은 없을 것 같다. MBA를 다닌다고 해서, 급여가 올라가는 것도 아니고 승진에 영향을 주지도 않는다. 다만 대학원을 가는 이유는 회사에서 열심히 일하는 만큼 권리 중 하나인 교육비 지원을 타내기 위해서 였다. 모든 직원에게 혜택이 돌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무난히 그 혜택을 누릴 수 있었기에 내 입장에선 더 미룰 이유가 없었다. 다만, 무엇을 공부할 것인가에 대한 숙제가 남아있었다. 


'정말 하고 싶은 것, 공부해보고 싶었던 것을 하자.'

서른 이후 줄곧 내가 온전히 방해없이 몰두 했던 것이 무엇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니 그건 다름아닌 '운동'이었다. 살면서 가장 어렵고 힘든 순간에 내가 다시 평정심을 찾게 해준 것 중 하나가 몸을 움직여 땀을 흘리고, 가쁜 호흡을 느끼는 순간이라는 것을 몇 년간 체험하게 되면서 운동을 공부해보는 것은 어떨까 싶었다. 전형적인 '인문대생'인 내가 스포츠심리학을 공부하게 된 계기다. 오래전 나름 심리학과를 졸업한 학사 졸업자격(?)이 있으니 명분이야 충분하지 않은가. 


그래서 일반대학원 문을 두들이게 되었다. 2년 전 지금의 지도교수님을 찾아뵙게 전에 비장했던 마음이 떠올랐다. 운동에 대한 열정만 있는 생활체육인이 이제는 기억도 못할 심리학과 출신이라는 이유만으로 스포츠심리학 석사를 하겠다고 찾아왔을 경우 나타날 수 있는 여러가지의 거절과 의혹, 의심의 시나리오를 상상하면서 말이다.

"절 뽑아주십시오. 회사를 그만둘 각오로 학업과 공부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아니 일을 소홀히 하겠습니다."(당시의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간 나는 마치 황장군 같았다.)

 

다행히도 황장군 코스프레가 먹혔던 건지 1 지망이었던 일반대학원에 합격하여 10살 넘게 차이가 나는 어린 동기생들과 함께 2년 째 나이롱 대학원생으로 공부하고 있다. 졸업 6개월을 앞둔 시점에 석사논문을 써야 하기에 엄청난 두통에 시달리는 요즘도 다시 한번 강조하자면, 그때의 선택을 후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든다. "그냥 대학원을 가지 말 걸"이라고.


가장 어려운 점은 '논문'이다. 명목상으로 공기업이라 함은 9 to 6를 확실하게 지키는 회사이기 때문에, 퇴근 후에 수업을 듣거나 과제를 하는 것이 그리 어렵진 않았던 적도 있었다. 게다가 내가 입학하는 학기에 운이 좋게(?) 코로나19가 터졌다. 덕분에 원격, 비대면 수업도 자주 들었고, 과제나 리포트야 워낙 보고서 업무에 이골이 났기 때문에 뚝딱 하고 해치우는 면은 있었다. 학점도 정성을 다하면 그렇게 박하지 않은 편이라 무난하게 B학점을 넘길 수 있다.(B학점 밑으로 떨어지면 학비지원을 뱉어내야 한다.) 


하지만 '논문'은 확실히 다르다. 입학하면서 다양한 논문들을 읽어가면서 내가 평소에 관심 있고, 공부해보고 싶은 주제를 진작 골랐어야 했는데, 막상 학기가 닥쳐서 주제를 선정하려고 하면 머릿속은 새하얘진다. 결국 수업시간 언젠가 한번 발표를 했던, 그중에서 좀 쉽고 관심이 갔던 이론을 부랴부랴 공부하고 급하게 주제를 선정한다. 주제를 정하고 나서도 구체적으로 어떻게 연구를 수행할지, 이론적 배경을 공부하는 것에도 꽤나 시간이 든다. 그러니 미리미리 했어야 했는데 끝까지. 미루는 버릇은 마흔을 목전에 두고도 고치지 못하는 불치병이다.  


수업을 듣고 학기를 보내면서 빚쟁이 같이 시간에 쫓겼는데, 그러다 보니 채무를 갚아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어느덧 논문학기가 되었는데. 이 논문이라는 건 아무래도 평생 꼬리표를 달고 다니는 것이라 대충대충 넘어갈 수가 없는 것이다. 한마디로 똥글을 쓸 수가 없다. 교수님이 그렇게 놔두지도 않는다. 주제를 정하긴 해도 누굴 대상으로 어떤 연구 방식을 채택할지도 어려운 과정이다. 그렇기에 내가 관심을 가진 이론이 과연 이 대상에게 먹히는지를 알아보겠다는 포부는 저 멀리 날아가고, 거의 대다수가 하는 '설문 연구 방식'을 택하게 된다. 설문지연구면 그냥 설문 만들어서 돌리면 되는 거 아니야?라고 할 수 있다. 


또 다른 난관은 여기에 있다. 설문지를 돌릴만한 '인맥'의 고갈이다. 학업 핑계로 집-회사-학교의 패턴을 몇 년째 반복하다 보니 평소 연락을 잘 유지하기 어려운 상태이기도 한 데다, 갑작스럽게 대뜸 잘 지내?-설문 좀 부탁해!^^를 시전 하기에 낯이 두껍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알음알음으로 설문을 부탁하고는 있으나 이 것 역시 힘에 부친다. 그래도 코로나19가 이 지점에서 다시 한번 날 살린 것은 맞다. 두 눈 딱 감고, 100명 넘는 학부 동아리 단체방이라던가, 친구들과 회사 후배들을 종용해 카톡으로 온라인 설문을 할 수 있다. 


그래도 대학원 생이라면 '자고로' 논문을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자기최면 시작) 학부에서 논문을 쓰고 졸업하는 경우도 있다지만, 대학원생이 논문을 쓰지 않는다면 그것은 대학원생이라 할 수 없다는 항간의 이야기를 붙들어 매면서 고통을 견디고 있다. 아마 이번 설 연휴에도 통계 책을 붙들고 씨름하고 있지 않을까? 구조방정식 이건 도대체 도무지 모르겠다. 지금 기억나는 건 이차방정식뿐이다. 그냥 차라리 직장인 MBA 가서 놀고, 술 마시면서 인맥이나 넓히는 면이 인생을 윤택하게 했을까? 그보다는 그냥 아무것도 안 하는 게 나았을지 모른다. 그냥 대학원을 가지 말고 놀았어야 했다. 논문은 이렇게 고통스러운 과정이다. 인사성 없고 데면데면한 나 같은 사람에게 설문지 수집은 길거리 전단지 돌리는 일만큼 어렵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