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심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생일'이 돌아온다는 건, 나이를 한 살 먹었으니 어디선가 만나이를 적을 때 무슨 숫자를 적어야 하는지 잠시 잠깐 생각하게 하는 것 말곤 큰 의미를 갖지 못하게 된다. 어제부로 만 39세가 되었다. 어찌 됐든 한 살 더 먹는 거라, 크게 달갑지도 않지만 그렇다고 늙음을 한탄하면서살짝 우울감에 젖기엔 새삼스럽기도 하고, 무엇보다 눈이 건조해서 눈가가 촉촉해지지도 않는다.(마음은 더욱 건조할 터).
그래서 생일은 그저 그런 어떤 보통 날인 동시에 살짝은 불편하기도 한 애매한 날이 된다. 출근 일에 생일이 있으면, 혹시라도 사무실 사람들이 고깔모자라도 사서 생파라도 해줄까 싶어 일부러 휴가를 낸다. 요즘 회사는 코로나 이후 그런 문화가 없어져서 참 다행이고, 내가 나이가 먹어서 강제로 모자를 씌우고 초를 불게 하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으니 나이 드는 게 좋은 장점도 있다.
한 때는 카카오톡에 생일 알람이 뜨다 보니 친구, 지인들로부터 축하 메시지가 많이 오곤 했다. 오랜만에 반가운 연락은 기분이 좋았지만, 기프티콘 선물을 주는 것은 살짝 부담스러웠다. 나중에 상대방의 생일을 일일이 기억해서 갚아야 한다는 생각에 상대의 진심 어린 축하조차 나에게는 부채처럼 느껴졌었다. 이런 내가 팍팍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사람 마음이 그렇지 않나. 인지상정이라고, 자신의 준 마음만큼 돌아오지 않는다면 그게 마음이든 물질적인 것이든 서운할 테니 말이다.
IT기기에 무지한 자이지만, SNS 자동알림이 뜨지 않게 설정 한 이후, 생일축하 연락은 현저하게 줄었다. 친한 친구들조차 육아에 직장생활에...현생에 치이고 바쁘다 보니 생일인지 모르고 넘어간다. 나 또한 그들의 생일을 억지로 기억하지 않고, 알람을 꺼두다 보니 생일을 기념하여 연락을 하거나, 무엇을 주고받는 행위는 사라졌다. 그저 얼굴을 보고 만날 때, 그 달에 생일이 있다면 그날이 생일이 된다. 서운함이라는 감정에는 특별히 무딘 성격이라 서운함을 줄 수 는 있지만, 서운함을 느끼지는 못한다.
문제는 엄마다. 과년한 나이에 흰머리가 성성한 딸에게 미역국을 끓여줘야 하나, 주말에는 약속이 있나 체크해야 하는 부담감이 생기나 보다. 그래서 이번엔 주말과 겹쳐버린 생일 일정을 미리 알려줬다. 주말 내내 약속이 있고, 생일 당일인 일요일에는 하루종일 나가 있어야 하니 각자 스케줄 대로 움직이라는 내용이었다. 누구와 어딜 가는지 묻지 않는 엄마는 새삼 혹시나, 연애를 하는 것은 아닌지 상기된 얼굴로 웃음짓는 이모티콘 하나를 덜렁 보내왔다.
모친 : 주말에 스케줄이 있어?...
나 : ㅇㅇ토욜 저녁약속 있고, 일요일은 하루종일
모친 : 구래~~~
그런 기대와 희망을 무참히 짓밟을 필요는 있었나 싶지만, 1분이 채 되기도 전에 엄마도 익히 알고 있는 친한 친구와 야구경기를 보러 간다고 바로 메시지를 보내고야 말았다.
나 : 일욜에 00이랑 야구 보러 가기로 했어. 하루종일임
모친 : 실망스럽네....
나 : 뭘 기대한 거야? ㅋㅋㅋ
모친 : 눈치를 보며~~~ 기대를
엄마의 기대를 무릅쓰고 그렇게 한 7여 년 만에 야구장으로 향했다. 야구를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고, 응원하는 팀도 없지만 그냥 친한 친구와 함께 치킨과 맥주를 야외에서 먹는 것에 의의를 뒀다. 일기예보에는 강수확률이 높았고, 경기가 취소될 가능성도 있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하지 않았다. 경기시작 두 시간 전에 도착해서 치킨을 신나게 먹으면서 수다를 떨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는데, 후드득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챙겨 온 우비를 입고 비가 가늘어지길 기다리는데 좀처럼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아 실내 카페로 몸을 피했다. 결국 우천취소. 생일 기념 먼 길을 찾아온 야구장 나들이는 그렇게 끝났다.(물론 치킨은 다 먹음)
그런데 이 날의 중요한 사건은 경기장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발생했다. 신고 나온 뉴발란스 USA운동화 뒤축이 갑자기 너덜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10년 전 사귀었던 남자친구에게 받았던 운동화였는데, 그걸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지다 보니 모셔두기만 하고 별로 신질 않았었다. 그래서 겉보기엔 여전히 새것 같은 느낌이라 이 정도로 삭아있을 줄은 몰랐던 거다. 이런 게 안전 불감증인가?
신기한 건 찢어진 운동화를 한참 보고 이걸 쓰레기통에 넣자니 왜 갑자기 아쉬운 감정이 드는지 모르겠다. 예쁘고 힙하고 지금 생각하니 미래지향적 이기조차 했던 뉴발란스 화이트 운동화. 선물 받을 땐 내 눈엔 별로였는데, 패션고자인 나를 뭐라 하면서 센스 있던 그 남자가 사주면서 얘기했던 말들이 하나씩 다 떠올랐다. 심지어 바로 어제까지 친구들이 10년 전 받은 선물이라고 하니, 요새 유행하는 신발을 10년 전에 받았냐고 놀라기까지 했는데. 주인을 잘못 만나 신발장 그늘에서 썩은 시간이 너무나 길었던 운동화 사망식을 39세 생일에 치르고 나니 '아끼다 똥 된다.'는 말이 뭔지 갑자기 알 것 같다. 분명히 손이 가지 않아 잘 쓰지도 않았건만, 이 물건은 나한테 그래도 꽤나 소중했던 모양이다. 이제 너를 보내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