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쪽에 사인해 주시겠어요?"
정말 오랫만이었다. 서명이라니. 불과 아홉달 전만 해도 수도 없이 했던 서명이었다. 습관처럼 이름옆에 항상 서명을 했다. 결재를 올리기 전 내 이름옆에 무심코 자리잡던건 내 이름과 비슷한 내 서명이었다. 처음엔 꽤나 멋진 필체로 휙 써내려간 서명이었는데 근 십년이 지나자 많이 바뀌었다. 번드르하고 힘있던 서명은 어느새 흐늘해진 형태로 쓰였다. 매번 하는 서명이다보니 귀찮아서 그렇게 변한 것이겠지만 어쩌면 그 서명의 느슨함이 나와 닮았다는 생각을 했다.
육아휴직을 한지 아홉달째. 많은 변화가 있었다. 그토록 바라던 쉼이었다. 진짜 한번만 쉴 수 있다면 다리 하나가 살짝 부러져도 괜찮을 것 같다고 생각했을 정도였다. (물론 정말이지 어리석은 생각이라는걸 알지만) 아침이 힘들었고 점심이 피곤했고 저녁이 아쉬웠다. 그렇게, 생각지도 못한 휴식이 찾아왔다. 맙소사.
처음엔 주구장창 잠만 잤다. 직장을 다니지 않는다면 가장 먼저 하고 싶었던 것은 비젼을 찾는것도, 여행도, 공부도 아닌 그저 잠이었다. 잠.잠.잠. 그냥 지금이 몇시인지도 모르게 잤다. 늦잠도, 낮잠도 너무 행복했다.
책을 읽었다. 손에 집히는대로. 장르가 무엇이건 그냥 닥치는대로 읽어댔다. 여유롭게 넋을 놓고 책을 읽어본게 언제인지. 늦잠을 늘어지게 자고 대충 빵쪼가리와 우유로 밥을 대신하고 쇼파에 걸터앉아 책을 읽었다. 읽은 책은 제자리가 아닌 그냥 그 자리에 두었다. 정리가 안되건 말건.
예능과 드라마를 봤다. 새벽까지 그들과 울고 웃었다. 진짜 쓰잘데기없이 그렇게 필사적으로_ 마치 티브이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열한시가 넘어가면 다음날 걱정에 제대로 놀지 못한 한을 푸는건지 뭔지 두세시까지 그렇게 놀아댔다.
꿈같던 육개월을 보냈고, 제2의 인생이 시작되었다. 찰나의 순간처럼 지나간 육개월은 어쩌면 제2의 인생을 시작하기 전 마지막 휴가였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한다. 직장생활의 치열함이 새파란 파랑이었다면 어쩌면 육아는 불타는 빨강이 아닐까 생각한다. 결재문서에 무심한듯 멋드러지게 서명하던 나는 지금은 그저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누군가의 엄마일 뿐이다. 랭대리가 랭엄마가 되는 그 순간. 나는 더 이상 서명이 필요하지 않았다. 나 스스로가 승인권자였기 때문이겠지.
180도 다른듯 또 비슷한 치열한 삶이다. 근 삼주만에 주어진 잠깐의 자유. 그리고 따뜻한 차 한잔을 앞에 두고 자꾸만 그 말을 되새긴다.
"이쪽에 사인해 주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