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옷 말이야, 그만 입으면 안돼?
그가 말했다. 나는 막 샤워를 마치고 머리의 물기를 닦으며 물끄러미 입은 옷을 내려보았다. 요즘 매일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며 손에 집히는대로 옷을 입곤 했다.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저 옷장 네번째 서랍 맨 위에 있던 티셔츠일 뿐이었다.
티셔츠 안에는 6가지의 문양이 있었다. 알록달록한 문양 아래 회사의 모토가 있었다. 멋드러지게 영어로 적힌. 굉장히 있어보이려 적은것 같았지만 결국 똑바로살자, 뭐 이런 내용이었다. 도덕을 강조하는 조직다웠다. 머쓱해진 얼굴로 그를 쳐다보았다. 씩 웃었다. 민망함을 웃음으로 대신했다.
침대에 누웠다. 문득 손에 닿는 옷의 촉감이 어색했다. 그저 면 티셔츠일 뿐인데 오늘따라 여러 의미들이 떠올랐다. 한여름 더위에 집에서나 입는 목 늘어난 티셔츠라는 현실은, 그것이 가진 여러 문양과 모토라는 자부심과 꽤 대조적인 느낌이었다. 현재의 내 모습 때문일까.
티셔츠를 처음 받았을 때를 기억한다. 나름 잘 나갔던 그때. 조직에서 제일 먼저 불리움을 받았다. 연수에 참석해야 하는 첫 회차 대상이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꽤 뿌듯했다. 사무실에서 일을 하지 않고 연수원으로 간다는 기쁨과 함께 이상적인 주제들에 대해 토론하고 미래를 꿈꾸며 마치 당장 내일이라도 새로운 조직을 만들 수 있을 것 같은 환상에 젖어 열정을 불태웠던 그때. 불과 삼년 전 이야기인데 아득한 옛날처럼 느껴졌다. 응답하라 시리즈에서 정봉이를 보았을때 그 느낌처럼 꽤 오래되었지만 반가운 그 느낌. 한때 아나운서를 꿈꾸며 공부했지만 택도없는 외모의 장벽에 부딛혀 자연스럽게 접어졌던 아주 잠깐의 꿈은 현재 이 조직에서 프레젠테이션을 진행하면서 가끔 떠올리곤 했다. 어쩌면 나의 참으로 빛난던 그 시절.
풀은 마르고, 꽃은 시든다고 했다. 나에게 빛난던 그 시절이 있었다면 지금은 그저 입사 십년차 대리일 뿐이다. 곧 승진을 위해 죽어라 뛰어야 할지 모르는 그런 대리. 육아휴직을 하면서 쉼과 커리어의 어떤 경계에서 꽤 많은 고민과 갈등중인 그저 초라한 한 인간. 목 늘어나고 빛바랜 티셔츠같은 느낌이다.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이다. 늦지않은 제2의 인생을 시작할 때가 아닌가_하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쉼없이 달려왔다면 이제 달려온 길을 좀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그 길을 달려왔을때 기쁜 사람도 슬픈사람도 결국 '나'일테니까. '책임지다'는 말의 무서움은 결국 그 아픔을 나눌 사람이 없다는게 아닐까.
하_고민많은 청춘이여.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