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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g Sep 04. 2017

10. 조리원

조리원이라 쓰고 천국이라 읽는다.

만 네 살쯤부터 안경을 썼던 나는 눈이 지독히도 나쁘다. 사실 시력에는 마이너스라는 개념이 없다고는 하지만 여하튼 내 시력은 스무 살쯤엔 마이너스 6 디옵터 정도 되었고, 컴퓨터와 휴대전화가 일상이 된 지금은 8디옵터가 조금 넘었다. 게다가 난시도 심해서 안경을 쓰면 인류를 구원할 세기의 발명가처럼 보였다. 그래서 고3 수능이 끝나자마자 렌즈를 맞췄다. 그리고 그 이후로 근 십오 년을 렌즈로 살아왔다. 라식을 해보는 건 어떠냐는 수도 없는 질문에 '무서워서'라고 대답했지만 사실 아픈 게 무서운 게 아니라 혹시라도 더 안보일까 봐 무서운 거라는 구구절절한 설명을 덧붙이지는 않았다. Y는 렌즈를 낀 이후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너 말이야, 긁지 않은 복권이었어'


서론이 길었다. 여하튼 눈에 대한 막대한 콤플렉스가 있었던 나는 아파트 분리수거를 하러 갈 때도 렌즈를 꼈다. 안경 쓴 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이 놀라는 게 싫어서. 하지만 그랬던 나는 제왕절개 후 병원 밖을 안경을 낀 채로 어기적 어기적 기어 나왔다. 이상하게 안경을 끼면 렌즈를 꼈을 때 보다 사물이 작게 보이는 경향이 있는데, 그래서인지 나 자신도 굉장히 작게 느껴졌다. 머리를 감은 게 근 5일 전, 세수만 간신히 한 푸석한 얼굴, 그리고 돌돌이 안경까지. 맙소사. 서둘러 차에 올랐다.

조리원에 입성했다. 조용한 복도를 지나 내 방이라고 말한 곳으로 들어갔다. 살짝 더운 느낌의 바닥. 오래됐지만 깨끗한 침대와 작은 책상. 그리고 그 방에서 가장 좋아 보이는 TV. 원룸 형태의 방이었다. 방에는 갈색 커튼이 쳐져 있었는데, 그 커튼 사이로 오후의 빛이 길게 들어오고 있었다. 2주간 난 그저 누워서 딩가딩가 TV나 보면서 차려주는 밥만 먹으면 되는구나!! 야호!!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글쎄, 삼일쯤 지났을까. 그 안이 너무 갑갑했다. 아직 집에 가려면 10일이나 남았는데 어떻게 견디나 싶었다. 2주가 이렇게 길 줄이야. 신생아실을 물끄러미 쳐다보다 하루가 갔다. 아기를 먹이고 씻기는 일이 그리 어려워 보이지 않았다.


하루 두 시간씩 모자동실 시간이 있었다. 아기는 잠만 쿨쿨 잤다. 뭔가 해주고 싶었는데 쿨쿨 자는 아기를 깨워서 뭘 해야 할지 몰라 자는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자는 모습이 천사 같아서 사진과 동영상을 찍기도 하고 이따금 조곤조곤 말을 걸어보기도 했다.


힘들었던건 딱 하나, 하루 열 번 이상의 수유시간이었다. 다른 산모들이 너무 부러웠다. 어느 날은 수유실에서 수유를 하고 방으로 돌아와 유축을 하다 엉엉 울어버렸다. 모유가 안 나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다. 미련하게도.


H에게 일주일만 있다 집에 가겠다고 말했다. H는 그러라고 했다. 하지만 일주일만 있다 돌아간다고 해도 50% 환불이 되는 건 아니라고 했다. 지겨움보다는 돈이 아까워서 일주일을 더 채워 본래 계획대로 2주를 있다 나왔다. 미세먼지 가득한 바깥공기마저 그리웠다. 드디어 집에 가는구나!


세상에, 그런데 집에 온 지 반나절만에 조리원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조리원에 있어본 적 없는 H마저 그곳이 그립다고 했다. 하하. 그리고 문득 둘째 엄마들의 조언이 생각났다. '조리원이 답답해 보여도 천국이에요. 집에 가면 하루 만에 그리워질걸요? 여기서 아기랑 같이 걸어나갈때까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호호'


그러게. 천국에 있을 때 좀 즐기다 올걸 그랬다. 어이구, 이 암것도 모르는 첫째 엄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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