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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ng Oct 10. 2017

14. 산후우울증(2)

세수와 양치. 아주 기본적인 욕구를 충족하고 나왔다. 새근새근 자고 있는 미드미를 보러 갔다. 천사 같았다. 정말이지 너무 예뻤다. 그래, 내가 이맛에 살지!라고 외치고 싶었지만 천사 같은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가가 옆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뭔가 굉장히 신경질이 났다. 마음속이 펄펄 끊는 찜기가 된 느낌이었다. 가득 찬 찜기. 다 쪄졌으니 누가 뚜껑을 좀 열어 꺼내 줬음 싶은데 그렇지가 않아서 속이 터져버릴 것만 같았다. 머릿속에 스팀이 가득 찼다. 그리고 참 이상한 데로 불똥이 튀었다.

나는 항상 H에게 불만 같은 자격지심이 있었다. H와 나는 같은 꿈을 가지고 20대를 보냈는데 그는 이루었고 나는 이루지 못했다. 그는 꿈을 실현한 사람이 되었고 나는 꿈을 꾸었던 사람이 되었다. 그는 현재를 살고 있는 사람 같았고 나는 과거를 추억하며 살고 있는 사람 같았다. 연애를 하고 결혼을 하고 살아온 십 년의 세월 동안 그는 항상 나보다 살기 수월해 보였다. 난 항상 그보다 야근이 많았고 조직적인 직장문화를 경험했으며... 하여간 여러모로 드럽게 빡셌다. 그런데 아기를 낳고 보니 앞으로도 난 계속해서 H보다 힘들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주 양육자는 나였고, 하필이면 나는 예민했으며, 잠귀가 밝았다. 한번 잠들면 웬만한 소리에도 꿈쩍 않는 H는 이미 정황상 우위를 차지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H가 너무나 얄미웠다.


산후우울증엔 여러 가지 모습들이 있겠지만 나에겐 H에 대한 분노심으로 나타났다. 미드미는 너무 예뻤고 사랑스러웠지만, 초라하기 짝이 없는 내 모습과는 상대적으로 계속된 일상을 살아가는 H모습이 미웠다. 왜 나만 배가 나와야 하지? 왜 나만 머리가 빠져야 하지? 앞으로 내 경력은 어떻게 되는거지? 아니, 다 떠나서 넌 왜 대체 아기가 우는데 한 번을 일어나질 않는 거야!! 넌 지금 쌓여있는 젖병을 보고 삶아야겠다는 생각이 안 드냐!!!!라고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따박따박 조리 있게 이야기하지 못하는 성격 탓에 그저 청승맞게 새벽에 울었다. 울면서도 넌 내가 울고 있는데 일어나서 왜 물어보질 않는 거지!!!라고 생각했다. 어우, 이 해삼 멍게 말미잘 같은 인간.


그리고 어느 날. 정확히 말하면 150일째 되던 날 나는 폭발했다. 폭발이라는 단어는 이럴 때 쓰는 거구나 라고 생각될 만큼의 큰 폭발. 생각해보면 제정신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리고 내가 뭐라고 했는지도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내 삼십삼 년 인생에서 가장 조리 있게 말했던 순간이었다는 것. 말하면서도 나 스스로도 대박이라고 생각했다는 것. 그리고 H의 벙찐 모습 정도랄까.


그날 이후 H는 나름의 방법으로 맞춰주려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신기하게도 마음 찜솥 안 내용물들을 전부 다 끄집어낸 그날 이후, 속이 시원했다. 아주 많이.



출산 후 나는 많이 못생겨졌다. 그전에도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얼굴은 아니었지만. 살이 좀 쪘고 빠진 머리가 나기 시작하면서 아기 대머리 독수리처럼 보일 때도 있다. 하지만 모든 것엔 시간이 필요한 법이라 생각하는 중이다. 6개월이 지난 후부터 아기가 자는 늦은 밤엔 야간 요가도 다니고, 잃었다 생각한 꿈에 대해 다시 재정비하는 시간을 갖기 시작했다. 무릎을 꿇고 걸레질을 하거나 손수건을 일일이 짜는 수고스러움 대신 세탁기의 힘을 조금 더 빌리거나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한다. 새벽녘 알아주지도 않는 울음을 우는 대신 나 혼자 산다를 보며 낄낄거리면서 맥주 한 캔 홀짝거릴 마음의 여유도 생겼다. 누군가가 나의 힘듬을 알아주기를, 이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나 스스로 나를 조금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고자 노력 중이다. 물론 아직도 거울을 보면 한 숨 쉴 때가 많지만. (그리고 아직 배도 다 들어가지 않았지만.....점점 건강한 돼지가 되어가는것은 기분탓이라 여기며....허허)


산후우울증은 도움이 절실한 '병'이라고 생각한다. 그 병을 앓았던 나 역시도 주위 사람들이 가장 중요했으니. 예쁘지 않더라도 예쁘다고. 당신은 정말 멋진 엄마라고. 정말 큰일을 했다고. 아기와 둘이 하루 종일 지지고 볶느라 수고가 많다고. 나는 할 수 없는데 당신은 참 잘하는 것 같다고. 어디 아픈 곳은 없는지. 오늘은 뭐 특별하게 재밌거나 힘들었던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달라고.... 따뜻하고 조금은 과장된 위로로 치유될 수 있는 마음의 병. 매일 약을 먹듯, 그렇게 매일 위로해주면 많이 좋아질 수 있는.


짧은 생각과 경험으로 산후우울증을 겪고 있을 누군가에게 더 큰 상처를 주는 건 아닐까 싶어 많이 염려되기도 한다. 너무 힘들지 않기를. 너무 절망 속에 있지 말기를. 당신은 충분히 아름다운 사람이니까. 그리고 무엇보다 나 없이는 못 사는, 이 세상에서 내가 전부인 아기가 옆에 있으니 힘내시라고!!!! (하지만 그 아기가 울어댈 때면 정말이지 아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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