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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내 친구들을 대하는 태도

by 난화

너, 다른 애랑 놀면 내가 때려버릴 거야!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최초의 친구가 내게 건넨 말이었다. 그녀는 하얀 태권도복에 띠를 질끈 묶은 덩치가 아주 큰 여자애였다. 9살, 이사와 전학으로 낯선 생활이 시작되었고 어수룩하고 내성적인 나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시골에 있다가 큰 도시로 이사를 갔는데, 소심한 꼬마인 나에게 아파트도 학교도 너무 거대하기만 했다. 한 교실에 50여 명이 넘는 아이들이 바글거리던 90년대의 국민학교에서 나는 마음 붙일 친구를 만나지 못했다. 그때 내게 다가와 준 아이가 바로 그 태권 소녀 아연이었다. 같이 뭐 하고 놀았는지 기억나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허리춤양손을 얹고 나를 내려다보던 모습과 이름만큼은 아직 남아 있다.


다른 친구랑 놀면 나를 때리겠다는 아이와 나는 함께 다녀야 했다. 당시 나는 키가 작고 목소리도 작은 아이였다. 세련되고 당찬 도시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늘 고개를 숙이고 다녔다. 선생님이 심부름을 시키면, 학교 안에서 길을 잃을 정도로 한심했다. 그래서 나는 주로 학교 안에 있는 사육장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거위, 닭, 토끼 등이 있었는데 냄새가 지독해서 그런지 오는 이가 드물었다. 나는 사육장 근처의 풀을 뜯어 안으로 넣어 주고 동물들이 내가 건넨 풀잎을 오물오물 받아먹는 모습을 지켜보고는 했다. 걔들이 나에게는 친구였다. 태권도를 하는 아연이와 함께 말이다.


어느 날, 나는 아연이에 대해 엄마에게 털어놓았다. 안 그래도 엄마가 나를 전학시키며 담임 선생님께 특별한 마음을 표현하지 않아서 나는 구박을 받고 있었다. 눈치껏 조용히 앉아 있던 내가 왜 장난꾸러기 남자아이들과 함께 칠판 앞에 무릎 꿇고 손드는 벌을 받는지 이해를 못 했었다. 그 시절은 선생님께 선물이나 봉투를 드리는 게 흔했는데, 엄마가 대쪽같이 그 뜻을 거절하는 바람에 나는 구박덩이 신세가 되어야만 했다. 토끼와 거위를 친구 삼아 지내는 것은 괜찮았지만, 아연이의 위협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고 결국 엄마에게 일러바쳤다.


엄마는 우아한 베이지색 카디건을 걸치고 집에서 햄버거 파티를 열었다. 1990년에 집에서 만드는 수제 햄버거라니! 지금으로 치면 집에서 랍스터와 캐비어를 준비한 것처럼 화려하고 사치스러운 음식이었다. 엄마는 햄버거용 빵을 산더미처럼 꺼내고, 다진 고기에 양념을 해서 패티를 만들어 넣어 큰 쟁반에 가득 쌓았다. 그리고 아연이를 불렀다.


아연아, 맛있게 먹고 우리 딸하고 사이좋게 지내렴.


그렇게 엄마는 아연이에게서 나를 구했다. 우리는 1년 만에 다시 어느 변두리 마을로 이사를 갔다. 두 번째 전학이었다. 그리고 거기에서 또 다른 아연이를 만났고, 그 뒤에도 학창 시절 내내 불안한 친구 관계를 이어 갔다. 나를 꼬드겨서 성인 영화를 같이 보자고 했던 발칙한 10살 아이도 내 친구였고, 우리 집에 어른이 없는 걸 알고 자기 게임기를 가져와 몰래 같이 하자고 하는 애도 내 친구였고, 밭에 고구마를 훔쳐 가자고 하던 애도 내 친구였고, 나에게 연애편지를 전해 달라고 하던 애도 내 친구였다. 엄마는 그런 내 친구들에게 라면을 끓여 먹이고 떡볶이를 만들어 주었다. 그 애랑 놀지 말라고, 그런 말을 단 한 번도 안 했다.


중학생이 된 이후 나에게도 단짝 친구가 생겼다. 공부를 잘하고 똑똑했던 명이는 아버지가 사고로 돌아가시고 할머니와 살았다. 엄마는 돈 벌러 다른 데서 지낸다고 했다. 엄마가 가끔씩 와서 용돈을 주시는지, 내게 번번이 떡볶이와 김말이를 사주고는 했었다. 명이는 자기 집보다 우리 집에서 시간을 더 많이 보냈다. 우리 엄마가 해주는 밥을 먹고 간식으로 부침개까지 먹고 잘 시간이 다 되어서야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갔다. 건너 동네에 살던 선이는 언니라고 부르다가 엄마가 된 새엄마랑 같이 지냈다. 아버지와 새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갓난아기 동생도 있었다. 선이는 공동묘지를 지나야 올 수 있는 우리 집에 자주 들렀다. 공부를 싫어하면서도 내가 같이 공부하자면 잠자코 앉아 우리 엄마가 손수 만든 만두나 호떡을 먹었다. 밤이 되어 무덤 곁을 지나 돌아가야 하지만, 그래도 오래오래 우리 집에서 놀다 가고는 했다. 엄마에게 그 아이들은 내 딸의 친구가 아니라, 딸들이었다.


엄마,

나는 먹을 쌀도 부족한 우리 집에

자꾸만 친구들을 데려왔었지.

어른들의 눈에 밉게 보일 만한

아이들이었는데

엄마는 한 번도 싫은 기색 없이

찬장 안에 아껴둔 라면도 끓여 주고

밀가루로 수제비도 뜨고 만두도 빚어서

친구들이 실컷 먹을 수 있게 해 줬었잖아.


내가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린다는

이웃 엄마들의 입방정에도

엄마는 한 번도 나에게 걱정하는 말을 안 했어.

혹시 내가 그 애들에게 물들어

잘못된 길로 갈까 봐 두렵지 않았을까?


엄마는 그 애들이 가여웠나 봐.

집에 마음을 붙이지 못해 밖으로 돌고

어른들에게 배운 못된 말, 못된 짓을

따라 하는 그 애들까지 엄마는 품으려 했나 봐.


내가 딸을 낳고 보니까

이 세상이 내 아이를 상처 입힐까 봐

전전긍긍하는 마음이 올라오더라고.

누가 내 딸을 아프게 하지는 않나

내 아이를 소외시키지는 않나

내 아이를 괴롭히지는 않나

자꾸자꾸 예민해지는 거야.


나는 못난 어른이 되지 말자고

스스로를 설득해야 겨우 그 불안을

누를 수 있겠더라고.

남의 자식들까지 이해하는 것은

내겐 쉽지 않은 일인데...


엄마,

친구들이 엄마를 보고 싶어 해.

어느 때는 나보다 더 애틋하게 엄마 얘기를 해.

영이네 엄마는 우리 아이 돌잔치 때

봉투를 보내셨더라고.

옛날에 본인이 힘들 때

자기 딸을 돌봐줘서 고마웠다고 말이야.

그 마음을 기억하신다면서.


엄마가 베푼 사랑이

딸에게 돌아온다는 것을

엄마는 알고 계셨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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