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은 절대 안 한다. 그러나 연애는 반드시 한다.
그것은 나의 굳은 신조였다. 태어나서 처음 목격한 남자가 '아버지'였는데, 그가 자기 아내인 내 어머니를 평생 괴롭게 만들었으니 내가 결혼에 거부감을 갖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어떤 이들은 자기 원가족이 행복하지 못했기에 빨리 독립해서 자신의 가족을 만들고 싶어 한다. 그러나 나는 타인이 내 인생의 변수가 되게 할 자신이 없었다. 내가 성실하게 살면서 남에게 피해 주지 않으면 되는데, 내가 만난 놈이 갑자기 투자해서 돈을 날려 먹거나 불치병에라도 걸려서 내 인생을 고달프게 만들까 봐 두려웠다. 그때만 해도 나는 그냥 혼자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미련 없이 덜컥 죽을 마음이었다.
나는 지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남자'와 더불어 잘 살 수 있는 기회와 경험이 너무 부족했다. 어린 시절에 남동생과 동급생 남자애들은 '자기만 재미있고 나는 짜증 나는' 장난을 걸고, 하지 말라고 하면 더 하고, 결국 내가 울거나 독하게 덤벼 들어야 물러 나고는 했었다. 중학교, 고등학교를 다니던 90년대에는 시대의 발전과 무관하게 유교가 학창 시절을 지배하고 있었다. 여중, 남중, 여고, 남고가 많았고 남녀공학이라 해도 남자반과 여자반을 엄격하게 구분해서 복도 자체를 넘어가지 못하게 했다. 남자 친구는 날라리가 사귀는 거고, 단정한 학생은 대학에 진학한 후에 연애를 한다는 게 정설이었다. 나는 모범생을 추구하고 있었고 질서에 순응하는 타입이라 또래 남자아이들을 구경만 하면서 10대를 보냈다.
그러나 온 세상은 사랑, 을 말하고 있었다. 사랑이 얼마나 아름답고 황홀한 것인지 마음껏 꿈꾸도록 만들었다. 어디에서나 사랑과 이별 노래가 흘러나오고, 텔레비전을 켜면 드라마에서 고운 남녀가 애틋하고 절절하게 만나고 헤어지고 울고 뺨을 맞고 죽네 사네 했다. 고전 문학이라고 집어 든 여자의 일생, 제인 에어, 테스 등을 읽으면 그 여자가 얼마나 멋있고 잘났는지 상관없이 남자와의 사랑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었다. 여기에 비현실 그 자체인 순정 만화에 푹 빠지게 되면서 나의 소녀 시절은 낭만과 판타지로 가득하게 되었다.
나는 대학에 연애하러 가는 줄 알았다.(공부하러 가는 줄 알았으면 안 갔을 거다.) 나는 성적에 맞춰 진학하느라 여대에 갔다. 인생에서 후회라는 걸 거의 안 하는 내가 20년 동안 가장 후회한 선택이 바로 여대에 간 일이었다. 여대에 가니까 나이 든 교수님들 말고는 죄다 여자들만 있었다. 심지어 당시 21세기가 시작되는 시점이었는데도, 허가를 받지 않은 남자는 교내 출입 금지였다. 그래서 여자 친구를 만나러 온 남학생들은 여자들이 쏟아져 나오는 교문 앞에서 최대한 먼 산을 바라보며 뻣뻣하게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나는 꿋꿋하게 남자 친구를 만들어냈다. 인내와 좌절의 순간들이 있기는 했지만, 부지런히 밖으로 돌면서 기회를 찾아다니고, 소개팅 말이 나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일단 나갔다. 남자 사람 자체를 만나기가 힘들었기 때문에 뭐 조건을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드라마와 순정 만화 남자 주인공이 기준이다 보니 처음에는 현실에 적응하느라 애를 먹기도 했다. 그러나 20살, 21살의 나는 가슴이 뛸 준비가 되어 있었다.
드디어 좋아하는 남자를 만났다. 그는 친구가 적은 내향적인 사람이었다. 말수가 적어서 주로 내가 말하고 그는 웃기만 했다. 야구나 축구를 좋아하지 않고 음악 듣기나 영화 감상을 좋아했다. 2002년 월드컵에 휩쓸리지 않은 유일한 대한민국 남자였을지도 모른다. 수수하게 무채색 옷을 주로 입고 꾸미는 것에 별로 관심도 없었다. 감정 기복 없이 무던하지만 대단한 열정이나 에너지도 없는 사람이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은 아니었고 좋아하지도 않는 듯했다. 내가 좋아하는 남자, 내가 반한 남자는 매번 비슷했다. 조용하게 자기 할 일을 하고 말도 어눌하고 똑똑하거나 약지 못하고 스포츠에 관심이 없는 사람.
바로 아빠와 정 반대의 남자였다.
나는 좋은 대학 나오고 남들이 부러워할만한 직장에 다니는 남자가 싫었다. 논리적이고 박학다식해서 지성과 교양이 넘치는 것도 싫었다. 반듯하고 예의 바르고 호감형이라 인기가 많은 것도 싫었다. 돈이 많은 것도, 그 돈으로 자기를 꾸미고 치장하는 남자도 별로였다. 축구, 야구, 게임에 열을 올리는 것도 질색이었다. 우리 아빠가 똑똑하고 말 잘하고 인기 많고 자기 자신만 사랑하고 축구나 야구 중계를 보며 휴일을 보낸 남자였기 때문이었다.
내 세상에는 딱 두 종류의 남자만 있었다. 아빠 같은 남자, 아빠 같지 않은 남자. 이 얼마나 한심하고 편협한 시선이란 말인가. 내가 남자 친구를 사귀면 주위에서는 부러워하기보다는 왜 그런 사람을 만나냐는 말을 더 들어야 했다. 결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공부도 많이 하고, 책도 제법 읽고, 나 자신에 대해 성찰도 많이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헛똑똑이도 이런 헛똑똑이가 없다. 결국 엄마, 아빠를 벗어나지 못한 어린아이에 불과했으니까.
엄마,
사람들은 쉽게
엄마처럼 안 살 거야,
아빠 같은 남자 안 만날 거야,
하고 말하잖아.
꼭 그렇게 살 수 있을 것 같잖아.
나도 그랬거든.
아빠 같은 남자만 피하면 되는 줄 알았어.
취미도 없고 친구도 없으면
나만 좋아해 주는 사람일 줄 알았어.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은데,
한 사람의 인격과 존재를
제대로 바라보고 인정해줘야 하는데
내가 상처받지 않기 위한 길을 찾다가
깊은 함정에 빠져버리고 말았어.
엄마,
우리 아쉬워하지 말자.
엄마가 아빠를 만난 것
내가 아빠 같지 않은 남자를 만나려고 애쓴 것
그 모든 게 실수라고 하지는 말자
엄마는 최선을 다해 사랑했고
나도 내 사랑에 후회가 없으니까.
사랑받지 못했다고 슬퍼할 필요도 없어.
스스로 충분히 반짝거리는 존재임을 이제 아니까.